건설사엔 안 통하는 무늬만 ‘영업정지’
  • 길해성 시사저널e. 기자 (gil@sisajournal-e.com)
  • 승인 2022.04.28 10:00
  • 호수 1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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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9개 건설사 영업정지 됐지만 소송 통해 ‘시간 끌기’…관행적인 책임·손실 피하기 ‘꼼수’ 지적도

지난해 6월 발생한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 사고는 국민적 공분을 샀다. 당시 동구 학동4구역 재개발을 위해 철거하던 5층짜리 건물이 순식간에 7차로 도로변으로 무너졌다. 무너진 철거건물은 정류장에 정차해 있던 54번 시내버스를 덮쳤다. 이 사고로 9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다. 원청사인 HDC현대산업개발과 하청·감리 업체 등이 기본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인재(人災)’였다. 정몽규 HDC현산 회장은 사고 당시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학동 사고로 내릴 수 있는 최고 수위 처벌인 영업정지 8개월 처분을 HDC현산에 내렸다.

하지만 책임을 통감한다던 HDC현산은 처벌을 피하기 위한 행정소송에 즉각 착수했다. 행정처분을 받은 날 법원에 ‘서울시가 내린 영업정지 처분을 집행정지 해달라’는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법원이 지난 3월14일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18일 시작될 예정이던 영업정지 효력은 즉각 중단됐다. 여기에 행정처분 취소 소송도 제기한 상태다. 소송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제재 없이 영업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HDC현산은 현재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건설·부동산 분쟁’ 전문팀을 대리인으로 선임해 소송에 나서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1월13일 광주 서구 화정현대아이파크 주상복합아파트 구조물 붕괴 현장ⓒ시사저널 임준선

국민적 공분 산 HDC현산도 행정소송

중대재해를 일으킨 HDC현산이 손쉽게 징계를 피해 가면서 건설사에 대한 영업정지 처분의 유명무실 논란이 또다시 대두되고 있다. 그동안 건설업계에선 행정소송을 통해 처벌을 최대한 미루고 사업을 이어가는 행태가 반복돼 왔다. 마음만 먹으면 집행 시기까지 조율할 수 있어 사실상 효력이 없는 제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국토교통부 건설산업지식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5년부터 이달까지 사업장 소재지 지자체로부터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건설사(시공능력평가 순위 30위 내)는 9곳이다. 한양, 태영건설, GS건설, 쌍용건설, 한신공영, 코오롱글로벌, 현대엔지니어링, HDC현대산업개발 등이 이름을 올렸다. 9개 건설사가 받은 영업정지 건수는 11건이다. HDC현산을 제외한 대다수 건설사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2~3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산안법에선 2~5인 이하 사망 사고가 발생한 중대재해 현장에 대해 3개월 이하 영업정지를 내리도록 하고 있다. HDC현산은 건설산업기본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건산법에 따르면 부실시공으로 인해 일반 공중에 인명피해를 끼친 경우 영업정지 8개월의 행정처분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영업정지 처분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인 건설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건설사 9곳 모두 영업정지를 받은 직후 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과 행정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집행정지 가처분이 받아들여지면 영업정지 효력이 즉시 중단되고 영업활동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어서다. 이후 영업정지 처분이 정당한지 여부는 본안 소송에서 다루게 된다.

본안 소송이 진행되면 집행 시기는 더욱 늦춰진다. 통상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 판결까지 진행될 경우 3년 이상 소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오롱글로벌의 경우 영업정지 처분이 집행되는 데 3년이 걸렸다. 2015년 9월 근로자 2명이 사망하는 중대재해를 일으켜 2018년 7월 토목건축사업 영업정지 3개월 처분을 받았다. 코오롱글로벌은 집행정지 가처분과 취소 소송을 진행했다. 1심에서 승소했지만 2심에선 패소했다. 이후 대법원에서 코오롱글로벌의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지난해 8월 영업정지 처분이 확정됐다.

주목되는 사실은 건설사가 영업정지 집행 시기를 조율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간을 끌어 실적을 최대한 쌓은 뒤 원하는 기간에 소송을 취하하는 식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취소 소송에서 승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대부분 확정 판결까지 시간을 끌어 영업활동을 진행하기 위한 꼼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승소 가능성이 낮은 만큼 대법원까지 끌고 가지 않고 신규 영업 전략에 맞춰 소송을 취하하는 경우도 있다”며 “건설사 입맛대로 영업정지 집행 시기를 조정할 수 있는 셈이다”고 덧붙였다.

 

“안전사고에 대한 경각심 떨어뜨릴 수 있어”

업계에선 행정소송을 통한 시간 끌기로 영업정지 조치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HDC현산의 경우 학동에 이어 올 초 발생한 광주 화정동 아이파크 사건으로 인해 영업정지가 예고되고 있다. 서울시는 최대 1년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다는 계획이지만 행정소송으로 맞대응하면 사실상 행정처분 효력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이윤 추구가 기업을 영위하는 목적인 점을 고려해도 책임과 손실을 피하기 위해 건설사들이 소송을 남발하는 점은 우려되는 부분이다”며 “특히 이번 결정은 아무리 큰 중대재해를 일으켜도 소송을 통해 영업을 지속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행태가 중대재해를 줄이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서진형 공동주택포럼 공동대표(경인여대 교수)는 “안전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키워야 할 시기에 나타난 이 같은 행태는 잘못된 시그널로 비춰질 수 있다”며 “건설사들이 가처분 소송을 통해 영업 전략을 마련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을 만한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행정부의 획일적인 처벌 규정으로 인해 비롯된 결과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영업정지 처분을 받으면 기업은 물론 경제적으로 타격이 크다”며 “집에서 빈대가 나왔다고 집을 다 불태울 수 없듯이 사고 당사자 처벌은 당연한 것이지만 사업을 끌고 가는 사업주까지 처벌하는 건 지나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무조건 영업정지로 해결하려고 하니 행정소송으로 빠져나가려는 편법이 생겨난 것”이라며 “이런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도급 구조 개선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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