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흥행 3요소 모두 갖춘 리움 ‘이건희 컬렉션’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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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관람 열풍 일으킨 ‘리움미술관’
대기업 재원 의존하기보다 공공-민간 협력 활성화돼야
작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개된 청전 이상범의 '무릉도원도'.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로 그동안 한번도 실물이 확인된 적 없었던 희귀작품이다. ⓒ김지나
지난해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개된 청전 이상범의 '무릉도원도'.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로 그동안 한번도 실물이 확인된 적 없었던 희귀 작품이다. ⓒ김지나

우리나라 기업 중 삼성그룹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삼성이 소유하고 있는 리움미술관 역시 국내 최고의 민간 미술관으로 꼽힌다. 굳이 공공, 민간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미술계에 미치는 리움미술관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듯하다.

이는 1년 전, 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사망 후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이 때 아닌 미술 관람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더욱 공고히 증명됐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그 어떤 미술관, 박물관에서도 이 정도로 화제를 일으킨 전시는 없었다. 온갖 희귀한 작품들이 포함돼 있다는 컬렉션의 질적 수준, 이건희라는 인물의 지위와 명성,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국내 역사상 최대 규모로 국가에 기증한 사례라는 스토리까지, 전시 흥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광주, 양구, 대구 등 지역 미술관에서도 전시가 열리며 전국이 들썩였던 말 그대로 ‘세기의 기증’이었다. 리움미술관은 바로 그 이건희 컬렉션의 본산이었던 것이다.

한남동 리움미술관 전경.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콜하스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지나
한남동 리움미술관 전경.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콜하스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지나

세 건축가가 세운 건물, 그 자체가 소장품

리움미술관의 소장품은 시대와 문화권을 넘나드는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고미술품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가, 세계적인 현대미술 아티스트들의 작품까지 아우르고 있으며, 특히 야외 공간에 전시되는 대형 설치작품들은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더욱이 리움미술관은 대한민국 상위 1%가 사는 고급 주택가, 외국대사관이 모여 있는 요새와 같았던 한남동을 젊은 세대들이 찾는 감각적인 거리로 탈바꿈시키는데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리움미술관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건축이다. 이곳의 풍경은 언뜻 하나의 장소로 보이지 않을 만큼 이질적인 세 가지 디자인의 건축물들로 채워져 있다. 각각이 다른 건축가가 설계했기 때문인데, 그들 한명 한명이 내로라하는 건축계의 유명 인사들이다. 바로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다. 세 개의 건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는 모양이지만, 애초에 이런 구상을 한 것 자체가 그들 간의 조화를 신경 쓰기보다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도 소장품에 넣고자 했던 목적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게 완성된 리움미술관의 외관은 마치 건축물 전시장 같은 느낌이다.

지난해 5월 개관한 파리의 증권거래소 현대미술관. 프랑스의 억만장자 프랑수아 피노 일가에서 공간 리모델링과 전시 기획을 주도했다. ⓒ김지나
지난해 5월 개관한 파리의 증권거래소 현대미술관. 프랑스의 억만장자 프랑수아 피노 일가에서 공간 리모델링과 전시 기획을 주도했다. ⓒ김지나

파리시-재벌 손잡고 미술계 부흥

천문학적 스케일의 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문화예술과 도시 환경의 영역에까지 가공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삼성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옛 증권거래소를 리모델링한 현대미술 전시관이 오픈했다. 그 첫 전시는 구찌, 보테나 베네타, 생로랑, 발렌시아가, 알렉산더 맥퀸 등의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Kering) 그룹의 창업주, 프랑수아 피노(Francois Pinault)의 현대미술 컬렉션이었다.

일가의 자산 규모가 400억 달러가 넘는 프랑수아 피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억만장자 중 한명이다. 그는 현대미술 수집으로도 유명하며 이탈리아 베니스에도 미술관을 소유하고 있다.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리모델링한 그라시 궁전과 푼타 델라 도가나가 그것이다. 두 장소 모두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동시대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아티스트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전시하며 화제를 일으켰다. 이번에 개관한 증권거래소 미술관은 파리시에서 프랑수아 피노에게 50년 간 임대한 것이다. 파리시의회는 이 역사적인 건물에 대한 현대미술관 리모델링 계획을 승인했고, 복원과 개조에 소요된 모든 비용은 피노 일가에서 부담했다고 한다.

파리의 이번 증권거래소 프로젝트는 공공과 민간이 협력하는, 그리고 민간에서 조금 더 자율성을 가지는 구조 속에서 미술관이 더 좋은 공간디자인과 컬렉션을 갖출 수 있음을 보여줬다. 리움미술관과 이건희 컬렉션 열풍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점쳐지는 이유다. 일부 재벌이나 거대 기업 총수의 의지와 재원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다면 공공의 영역보다 민간에서 훨씬 획기적이고 다채로운 시도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랜 휴관을 마치고 재개관한 리움미술관은 한층 권위를 내려놓은 모습이었다. 젊은 아티스트들의 고민과 상상이 담긴 기획 전시는 과시하듯 고미술품을 사 모으던 재벌의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이제는 공공에서도 권위를 내려놓을 차례가 아닐까 한다. 리움미술관의 성공을 단지 한 대기업의 영광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더 많은 문화예술 공간의 잠재력을 끄집어낼 신호탄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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