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급’ 미술 전시가 몰려온다
  • 반이정 미술 평론가 (ls@sisajournal.com)
  • 승인 2022.06.19 13:00
  • 호수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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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개최한 앤서니 브라운과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전시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

예술의전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극과 클래식, 음악, 무용, 미술 등을 두루 관람할 수 있도록 마련된 서울 강남 소재 문화 랜드마크다. 강북의 세종문화회관과 함께 장르별 순수예술의 공연장을 집약시킨 일종의 예술 종합경기장쯤 된다. 한가람미술관은 예술의전당에 소속된 미술 전시장인데, 이곳에선 주로 인상주의 미술, 반 고흐, 피카소처럼 검증이 끝난 지 오래돼 ‘전설’이나 ‘신화’ 같은 수식어가 상투적으로 붙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미술가의 전시회가 열린다. 현존하는 미술가의 전시여도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명망가의 작품이 초대된다. 필자 같은 미술 관계자보다 일반인이 오히려 전시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경우도 적지 않다.

속내를 털어놓자면, 미술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생업이지만 한가람미술관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시를 자발적으로 가서 보는 일이 필자에겐 없다시피 하다. 그곳은 필자가 노는 물과 수질부터 다르다. 필자가 주로 방문하는 갤러리들은 전시실에 입장했을 때 관객이 혼자인 경우가 태반일 만큼 한산하며, 입장료는 당연히 없다. 반면 필자가 발길을 들일 일이 없다시피 한 한가람미술관 전시는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거나 때로 줄을 서서 관람해야 할 정도로 전시실에 관람 인파가 많고, 2만원 내외의 입장료를 받는다.

ⓒ김연희·UNC갤러리 제공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국 현대미술의 거장: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전시ⓒ김연희 제공
ⓒ김연희·UNC갤러리 제공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UNC갤러리 제공

휴머니즘과 스토리, 드라마로 대중과 공감대 형성

똑같이 미술 전시를 표방하지만 미술 전문가와 일반인 관객의 지향점은 이토록 대비된다. 지금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앤서니 브라운의 원더랜드 뮤지엄展》(4월28일~8월31일)에 대해 일반인 친구와 얘길 나눠보니, 그의 작업에 자주 출현하는 고릴라 캐리커처가 내게 어딘지 익숙하다는 점을 빼면, 친구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앤서니 브라운이 미술(전시)보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동화책 작가로 명성을 쌓았다는 걸 친구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렇듯 대중 블록버스터 미술 전시는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휴머니즘과 스토리, 그리고 드라마라는 선명한 공감대를 탑재하고 있다. 앤서니 브라운의 전시는 예술의전당에서만 2016년과 2019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개최다. 지방도시 개최까지 치면 전시 횟수는 더 많다. 전시를 다녀온 리뷰를 검색해 보자. 초등학생과 미취학 아동 자녀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람에 최적화된 문화상품이다. 이 말은 미술 전문가보다 보편적인 미적 취향, 나아가 가족이라는 특정 관객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미술이라는 의미다. 대중적인 쏠림을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나의 미적 지향과는 달라 이런 블록버스터 전시에 방문할 일이 내겐 통 생기지 않는다.

앤서니 브라운과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열린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4월8일~8월28일)도 생존하는 미술가의 전시인 점, 블록버스터급 전시장에서 개최된 점에선 같다. 다만 대중적 호소력과 주류 미술계의 트렌드를 나란히 갖춘 기획이랄 수 있다. 영국 미술이 1990년 초반 미국 미술을 위협하며 세계 미술계의 강자로 떠오른 때가 있었다. 당시 출현한 미술가를 일컬어 미술사에서는 ‘젊은 영국 미술가’라는 의미로 ‘YBA(영 브리티시 아티스트)’로 기록하고 있다. YBA 그룹의 주요 멤버인 데미안 허스트가 런던 골드 스미스 미대에 재학 중일 때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 교편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크레이그 마틴은 곧잘 YBA에 영향을 준 선배 미술가로 평가받는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그림은 단조롭다. 그래서 해석의 단서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평범한 사물이 홀로 또는 두어 점 나란히 화면을 채우는 게 다다. 작품에서 강조점은 대상과 배경을 채색한 형광 원색에 있다고 나는 본다. 그것이 그림을 결과적으로 평평하고 깔끔한 화면으로 귀결시킨다. 블록버스터 전시들이 공식처럼 따르는 스토리도 드라마도 휴머니즘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미술이 왜 유명할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앤서니 브라운의 원더랜드 뮤지엄展》 포스터(왼쪽)와 앤서니 브라운ⓒ한가람미술관 홈페이지 캡쳐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앤서니 브라운의 원더랜드 뮤지엄展》 포스터(왼쪽)와 앤서니 브라운ⓒ한가람미술관 홈페이지 캡쳐

소수만 알 수 있는 미적 진수 포함시켜 차별화

‘업계’에서는 좋은 작품의 기준으로 동시대성이 제시될 때가 많다. 캔버스 화면 정중앙에 출현한 전구, 노트북, 헤드폰, 게임기, 1회용컵, 스마트폰 같은 보통 사물은 2000년대 이후 전 세계 일상을 지배해온 주역들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동시대 삶에선 물신화된 지 오래다. 크레이그 마틴 회화에선 붓 자국을 찾을 수 없다. 그림 같지 않다. 마스킹 테이프를 사용해 깔끔한 인쇄물처럼 떨어지게 구성했다. 그의 브랜드다. 강한 원색이 강조된 색면은 우리 삶에서 색면이 중요한 시각 단위로 떠오른 현실을 반영한 것처럼 내겐 읽힌다. 나아가 산업사회 이후 고전적인 붓질이나 그림에 담긴 이야기보다, 감각적인 색과 깔끔한 화면이 소비자에게 호소력을 지닌 시대에 미술이 대응하는 변화로 이해되기도 한다. 전시장에 걸린 그의 색면 회화 중 상당수가 정사각형 캔버스인 점도 눈여겨보게 된다. 설령 작가의 의도가 아니어도 인스타그램 화면에 최적화된 틀을 고려한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다. 동시대적이다.

‘작품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푸념은 현대미술에 대한 어려움을 대변하는 문장이다. 그런데 별 의의를 담고 있지 않은 작품이라면 어떨까. 의미에 비중을 두지 않은 작품은 현대미술에 많다. 크레이그 마틴의 색면 그림도 의미보다 친숙한 동시대 감각에 전념한 작업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수갑 그림과 공간(SPACE)이라는 단어를 한 화면에 공존시키거나, 장갑 그림과 사랑(LOVE)이라는 단어를 한 화면에 중첩시킨 시리즈가 있다. 고의로 헷갈리게 만든 것이다. 대상과 단어의 고의적인 불일치가 초래하는 혼돈은 현대미술과 일반인 관객 사이의 거리감처럼 내겐 느껴진다.

필자의 해설을 다 읽고서 ‘뭐 별거 없잖아?’라고 되물을 줄 안다. 대단한 의미가 감동을 보장하는 게 아니다. 주류 미술판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미술가의 작품에는 요란한 감동이나 드라마가 아니라, 긴 시간 애착을 갖고 미술판을 지켜본 이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작지만 각별한 미적 체험이 있다. 그게 전부라면 전부다.

훈련된 소수자의 취향에 호소하는 만큼 주류 미술은 블록버스터가 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외롭진 않다. 많은 사람이 몰라도 소수만 알 수 있는 미적 진수가 예술의 본질이다. 한편 미술판에도 이변이라는 게 있어서 갑작스러운 주목을 받은 주류 미술의 어떤 부류는 그것의 본래 맥락과는 달리 대중의 기대치에 맞춰 없던 의미를 지어내면서 명성을 얻기도 한다. 비평적인 견지에서 그건 퇴행이다. 꾸준한 애착이 없는 관객에게 예술 감동의 진수가 찾아오긴 어렵다. 이건 다른 모든 전문 분야에도 통하는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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