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김종인만 성공? 野 ‘비대위 잔혹사’ 전철 밟나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7.0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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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권 쥐고 ‘강한 리더십’ 앞세웠던 비대위만이 성공
계파 갈등 휘말리는 순간 좌초…“우상호, ‘친명계’에 휘둘려선 안돼”

더불어민주당이 전당대회를 앞두고 띄운 ‘우상호 비상대책위원회’가 흔들리는 모양새다. 화근은 전당대회 룰(rule)이다. 전대 예비경선에 여론조사 30%를 포함시키는 안을 두고 비대위와 전당대회준비위원회, 당권 주자들 간의 파열음이 일고 있다. 비대위가 뒤늦게 전대위 안을 수렴하겠다 밝히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당 일각에선 이미 비대위에 대한 불신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정치권에선 이른바 ‘비대위 잔혹사’가 또 한 번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우상호 비대위’에 앞서 출범했던 ‘윤호중‧박지현 비대위’를 포함해, 여야의 비대위가 호평을 받고 해산한 전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야가 비대위에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데는, 비대위가 당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소수의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이 6일 국회에서 비공개 당무위원회를 마친 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이 6일 국회에서 비공개 당무위원회를 마친 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야, 선거만 끝나면 외치는 ‘비상과 혁신’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에서 패한 당은 앵무새처럼 ‘혁신’을 외쳤다. 기존 지도부는 후방으로 후퇴했다. 이후 어김없이 비대위를 출범시켰다. 그렇게 급조된 비대위는 당을 쇄신한다는 명목 하에 당의 조직, 직책, 공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수술대 위에 올렸다.

문제는 이 수술이 너무 잦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방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선거 등 각종 선거마다 비대위가 출범하다 보니, 여의도에선 ‘비대위는 연례행사’라는 뼈 있는 농담까지 흘러나온다. 실제 민주당의 경우 최근 9년 사이 6개의 비대위가 꾸려졌고, 같은 기간 국민의힘은 5개의 비대위가 탄생했다. 1~2년에 한 번꼴로 여야가 ‘비상 체제’를 가동한 셈이다.

그러나 야심차게 출범한 비대위가 목표를 이룬 사례는 드물다. 우선 비대위원장이 임시직이라는 게 걸림돌로 꼽힌다. 비대위원장은 당대표에 맞먹는 권한을 갖는다. 다만 비대위가 해산하는 순간 모든 권한을 내려놓게 된다. 임기가 보장되지 않은 ‘시한부 권력’인 셈이다. 이 탓에 강한 리더십을 갖기 어렵다. 비대위원장 자리가 ‘독이 든 성배’에 비유되는 이유다.

책임 분담하는 차원에서 공동비대위원장 체제를 꾸리기도 한다. 다만 이 탓에 분열이 일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호중‧박지현 비대위’다. 민주당은 대선에서 석패한 이후 지방선거에서의 반전을 목표로 비대위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윤호중 비대위원장과 박지현 비대위원장 간의 이견이 표출됐다. 이 탓에 당내 분란이 일었고 선거는 패했다. 결국 비대위가 촉발시킨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또 다른 비대위가 출범하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됐다.

비대위의 중립성이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이번 ‘우상호 비대위’의 사례처럼, 비대위가 특정 계파를 ‘쳐내기’ 위한 쇄신을 주도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과거 민주당(민주통합당)은 18대 대선 패배로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2013년 ‘문희상 비대위’를 출범시켰다. 비대위는 외부 인사가 참여한 대선 평가보고서를 작성했다. 문제는 비대위가 ‘친노무현계’ 핵심 인사들의 책임론을 거론하는 과정에서 보고서에 실명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이 탓에 비대위 후 당내 계파 갈등이 증폭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국민의힘에서도 같은 전례가 반복됐다. 2016년 총선 뒤 출범한 ‘김희옥 비대위’는 친박-비박계간 다툼을 조정하지 못했다는 책임론에 휘말리며 두 달 만에 막을 내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2016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뒤 등장한 ‘인명진 비대위’는 친박계 청산 문제로 친박 주류와 충돌했다. 결국 김무성·유승민 의원 등 비박계의 탈당 러시가 이어지면서 석 달 만에 문을 닫았다.

총선 투표가 마무리된 2012년 4월11일 오후 6시 한나라당 상황실에 마련된 TV 시청실 앞에서 박근혜 비대위 위원장이 비대위원들과 개표 방송을 시청하며 웃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총선 투표가 마무리된 2012년 4월11일 오후 6시 한나라당 상황실에 마련된 TV 시청실 앞에서 박근혜 비대위 위원장이 비대위원들과 개표 방송을 시청하며 웃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박근혜‧김종인, 비대위 이끌며 승리 쟁취하기도

다만 비대위가 출범 목표를 달성한 사례도 있다. 비대위원장에 ‘실세’가 앉는 경우다. 대표적인 예가 ‘박근혜 비대위’다. 박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시절인 2004년과 2011년 두 번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비대위원장을 맡은 박 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풍’으로 한나라당이 100석도 건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깨고 121석을 확보해 당을 극적으로 회생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2011년 다시 한번 비대위를 이끈다. 앞선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고 홍준표 대표 체제가 무너진 탓이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당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쇄신을 주도했다. 효과는 컸다. 새누리당은 재‧보궐선거의 참패를 딛고 이듬해 열린 총선에서 과반의석인 152석을 얻으며 승리했다.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박 전 대통령의 ‘이름값’과 친박계 의원들의 절대적인 충성이 강한 쇄신을 가능케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종인 비대위’ 역시 성공사례로 꼽힌다. 민주당은 2016년 20대 총선을 코앞에 두고 김종인 전 대표를 비대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당시 민주당은 선거 연패와 문재인-안철수 계파 간 갈등으로 침체돼 있었다. 김 전 위원장은 비대위 합류 조건으로 ‘절대적인 공천권’을 약속받았고, 실제 공천을 주도한 끝에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에 원내 1당의 승리를 안겼다. 이 과정에서 김 전 위원장이 ‘셀프 공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다만 중도인사이자 민주당계의 좌장으로 꼽히는 김 전 위원장이었기에 계파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게 정치권 중론이다.

이후 김 전 위원장은 진영을 바꿔 2020년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미래통합당의 당명을 국민의힘으로 바꾸고 정강과 정책을 개정하는 등 당의 변화와 쇄신을 이끌었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뒤 비대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결국 비대위는 ▲‘강한 리더십’을 갖춘 당내 인사 혹은 ▲진영을 떠난 ‘중립성’과 ▲검증된 ‘전문성’을 갖춘 외부 인사가 선두에 설 때 성공 확률이 높았다.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 ‘관리형 비대위’를 표방하는 ‘우상호 비대위’가 이재명 의원이라는 대권 주자의 존재감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또다시 계파 갈등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단 우려가 제기된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민주당의 구심점이었던 문 전 대통령이 물러나자마자 민주당은 계파 갈등으로 우왕좌왕하고 있고 좌표를 잃고 표류하는 선박이나 다름없는 상태”라며 “우상호 의원이 비대위원장을 맡았지만 친문계와 친명계의 충돌과 대립의 파고를 넘어설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박상병 인하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지난 선거에서 국민들은 ‘민주당이 더 이상 기존 방식으로 가면 안 된다’고 선거를 통해 심판했다. 이를 보면 오는 전대에서 기존 룰을 바꿔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우상호 비대위는 ‘(당원 보다) 일반 국민들의 뜻을 더 많이 반영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당내 갈등을 조정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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