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웅’ 젤렌스키는 어쩌다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나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7.09 16:40
  • 호수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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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젤렌스키에게 은근히 조건부 항복 압박
우크라이나 협상단 대표 주장…미국도 무기 지원 제대로 안 해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점령하기 쉽지 않지만 푸틴은 요지부동

2월24일 시작돼 개전 넉 달이 넘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미 4만7000명 이상의 전투원과 민간인이 숨졌으며, 1679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상당수 도시가 포격·폭격·미사일 등을 동원한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2300채의 건물이 붕괴한 것을 비롯해 재산 피해는 6000억 달러를 넘는다. 수십억~수백억 달러 상당의 군사장비가 파괴됐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협상장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탈출구를 찾아야 할 처지다. 하지만 러시아의 맹렬한 공격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도 필사적인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7월4일 동부 돈바스의 루한스크주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의 보고를 받고 “군사작전을 계획대로 계속 추진하라”며 추가 진격을 명령했다. 

공급망 균열에 따른 에너지 가격 인상과 경제난을 겪고 있는 서방은 우크라이나 지원을 두고 분열됐다. 영국은 저항을 촉구하지만, 독일·프랑스·이탈리아는 휴전을 요구한다. 특히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미 6월6일 “러시아가 외교로 출구를 마련할 수 있도록 굴욕감을 안겨서는 안 된다”고 말해 푸틴에게 전쟁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제공하자고 촉구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6월18일 흑해의 항구도시 미콜라이우를 방문해 전쟁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EPA 연합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6월18일 흑해의 항구도시 미콜라이우를 방문해 전쟁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EPA 연합

영국은 저항, 프랑스·독일은 휴전 요구

여기에는 100년 전 역사의 교훈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종전 뒤인 1919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 가혹한 조건의 베르사유조약을 강요하면서 독일인에게 굴욕감을 안기고 분노를 촉발했다. 당시 조약은 독일에 경제가 파탄날 정도인 1320억 금마르크의 배상금을 물리고, 무장해제 수준으로 군비를 제한하며, 모든 식민지와 일부 영토를 포기하게 하는 등 징벌적 조치를 가했다. 이는 베르사유조약 반대를 내세운 나치라는 독버섯이 자라는 토양을 제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문제는 푸틴이 요지부동이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양보할 뜻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이미 증명됐으며, 최전방에는 미국산 무기가 속속 도착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미 몇몇 서방국가가 전쟁에 대한 조기 피로감으로 우크라이나에 양보를 은근히 압박하는 정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협상단 대표인 미하일로 포돌이야크는 “서구는 우리에게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조건부로 항복하라고 압박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우크라이나가 요청한 무기를 충분히 보내지 않고 있다며 전쟁 무력증에 빠진 워싱턴이 이를 통해 양보를 은근히 압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적·인도주의적·군사적·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면서도 강력하거나 장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는 충분히 공급하지 않고 있다. 이미 140억 달러 이상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쏟아부은 바이든 행정부는 의회로부터 400억 달러의 지원 예산까지 승인받았다. 미국은 1941년 무기대여법을 제정한 지 81년 만인 지난 4월6일 개정안을 가결하면서 법률에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어’라는 목표를 명시했다. 미국은 40여 동맹국을 설득해 우크라이나에 전쟁물자를 공급하게 했다. 문제는 미국은 이 법을 적용해 우크라이나에 야포를 보냈지만, 장거리 미사일은 충분히 공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목할 점은 4월24~25일 키이우를 방문했던 미국의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이 “우크라이나가 승리하고 러시아가 약해지는 것이 전쟁 목표”라고 말했는데, 며칠 뒤 러시아 국방장관과의 전화통화에선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는 사실이다. 미 국방부는 정책의 변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바로 그 시점에 미국이 확전에서 협상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러시아를 패배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은 “쉽게 극복하기 힘든 격변과 긴장을 피하려면 두 달 이내에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더 큰 문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가 여전히 자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정치분석가인 볼로디미르 페센코는 이코노미스트에 “모스크바와 키이우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장기화할 경우의 위험 부담을 제대로 인식해 대화밖에 탈출구가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우크라 모두 자국 승리 믿고 있어

하지만 푸틴도, 젤렌스키도 현실 감각이 떨어져 보인다. 푸틴은 점령지를 그대로 영유하겠다는 입장이고, 젤렌스키는 러시아와의 경계선을 2월24일 개전 전으로 돌릴 것을 요구한다. 젤렌스키는 다보스 회담에 화상으로 참석해 “2014년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와 반군 점령지까지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사기 진작에는 한몫하겠지만, 조기 종전에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칫 전쟁 장기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연합에서 가장 큰 나라인 독일은 휴전을 요구하며, 이탈리아는 정치적인 합의를 강조한다. 마크롱은 러시아에 모욕감을 주지 않고 체면을 살려주라고 외친다. 이는 달리 말하면 2월24일 개전 이래 러시아가 점령한 돈바스 지역의 상당수와 우크라이나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라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를 러시아에 떼어주라는 것은 우크라이나인에게 모욕적일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모욕을 느끼지 않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젤렌스키는 당연히 여기에 반대한다. 그가 다보스 회담에서 “유럽과 세계는 단결해야 한다”며 “단결하면 더 강해진다”고 강조한 배경도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서방의 평화와 협상 무드에 대한 간접적인 반발로 볼 수 있다. 젤렌스키는 당시 “우크라이나는 모든 영토를 회복할 때까지 싸우겠다”면서도 “2월24일 개전 당시의 선으로 물러나면 러시아와 대화할 수 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젤렌스키는 독일 바이에른주 엘마우성에서 6월26~28일 열린 G7정상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해 “연말까지 전쟁을 끝내기를 바란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젤렌스키도 협상을 원하지만, 그 조건과 시기에 대해선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젤렌스키가 결연한 의지와 감동의 언어로 자국민과 서방을 하나로 모으고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효과적으로 이어간 ‘전쟁 지도자’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을 멈추는 방법을 찾는 데선 뭔가 부족함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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