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전세를 사는 사람들, 깡통전세에 사는 사람들
  • 대전=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2.09.05 07:35
  • 호수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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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임대인∙임차인 모두 피해자 만드는 깡통전세의 위험…부동산 시장의 들끓는 욕망이 빚은 참극

전세는 한국만의 독특한 주택 임대 방식이다. 위키피디아에는 ‘Jeonse(전세)’란 단어가 발음 그대로 등재돼 있다. 전셋집 주인은 담보로 보증금을 받고 계약기간만큼 집을 빌려준다. 기간이 끝나면 보증금을 오롯이 돌려주니 외국에서는 “렌트프리(rent-free·무상임대) 아닌가” 하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위키피디아는 심지어 “모든 점에서 훌륭한 거래”라고 평가했다.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상당한 위험을 제외하면.

세종시에 사는 A씨(40)는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오피스텔 9채를 갖고 있다. 매입가 기준으로 14억여원에 달한다. 수치만 놓고 보면 자산가다. 하지만 A씨는 “전부 고스란히 피해 본 금액”이라고 주장했다. 9채 모두 전세보증금이 매매가에 육박하거나 그보다 높은, 이른바 ‘깡통전세’이기 때문이다. 대전 유성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A씨는 “갭투자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깡통전세에 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며 “오피스텔을 매입하기 전인 작년 초로 돌아가고 싶다”고 토로했다.

A씨는 대전을 뒤흔든 수백억원대 ‘깡통전세 오피스텔 사기극’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사건의 핵심 피의자는 피해자들에게 “월세 세입자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란 거짓말을 하며 깡통전세 매물을 대거 팔아치웠다. A씨는 “월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데다 (피의자가) 오피스텔을 팔아주겠다는 말까지 해서 그만 속아넘어갔다”고 했다. 이어 “돈을 쉽게 버는 것 자체가 사기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내가 그 피해자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경찰은 6월말부터 사건을 수사 중이다. 그러나 아직 핵심 피의자는 소환조사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깡통전세를 이용한 사기의 덫은 전국에 퍼져 있다. 올 상반기 전국 아파트 중 7.7%(2243채)가 깡통전세였으며, 이 중 76.4%(1714채)가 지방에 위치해 있다. 정부는 8월24일 “특별단속으로 적발한 1만3961건의 전세사기 의심 사례를 경찰청에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 중에는 500여 명을 대상으로 1000억원 규모의 깡통전세 사기를 친 임대인도 포함돼 있었다.

5월20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상담 안내문이 붙어있다.ⓒ시사저널 최준필

욕심내 투자한 임대인...“갭투자도 안 해봤는데 당했다”

그 수법도 날로 치밀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집 한 채를 여러 세입자와 계약해 보증금을 가로채는 ‘중복계약’, 중개인이 세입자와 전세계약을 맺고 임대인과는 월세계약을 맺어 보증금 차액을 가로채는 ‘이중계약’ 등이 있다. 하지만 이미 고전적 수법이다. 이번 대전 사기극의 경우 피의자는 깡통전세 매물을 대기업 사택으로 속여 마치 바겐세일을 하듯이 경쟁적으로 매각했다. 여기에 당한 사람 중에는 현직 공인중개사도 있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대전 지역 중개사 B씨는 “늘 보는 표준임대차계약서에 누구나 아는 회사의 인감이 찍혀 있어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며 얼굴을 감쌌다. B씨는 “(피의자 일당이) 물건을 보여주며 ‘빨리 안 사면 세입자를 내보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겠다’고 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져 눈이 멀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내가 아파트만 중개하다 보니 깡통 오피스텔을 갖고 이런 식으로 장난치는 걸 전혀 몰랐다”고 했다.

B씨는 “거짓말에 속아 깡통전세를 산 사람들은 피해자지만, 일부러 깡통전세를 골라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깡통전세를 매입하는 ‘무자본 갭투자’도 그중 하나다. 예를 들어 매물로 나온 3억원짜리 빌라에 전세보증금 3억1000만원이 끼어있다. 투자자는 차액인 1000만원을 받아 취득세와 복비를 해결하고 소유권을 가져온다. 들어간 금액은 ‘0원’이다. 나중에 빌라 시세가 올라가면 차익을 보겠지만, 그 반대라면 보증금만큼의 빚을 지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조직적 사기에 악용되기도 한다. 신축 빌라 분양업자와 손잡고 세입자를 모집한 뒤, 분양대금보다 높은 전세보증금을 받아 나눠갖는 것이다. 지난 6월 기소된 ‘세 모녀 전세사기’가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깡통전세의 또 다른 피해자는 세입자다. 특히 깡통전세 비율이 높은 빌라나 오피스텔에 주로 사는 젊은 세대가 타깃이 된다. 지난해 발생한 전세보증금 반환 사고 피해자 중 20·30대는 64.7%로 조사됐다. 깡통전세에 사는 이들에게 전세 만기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눈 뜨고 코 베인 임차인...“모르는 새 피해자 됐다”

이아무개씨(28)는 지난해 10월 1년짜리 전세계약을 맺고 경기도 화성시 동탄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보증금은 1억5500만원. 그런데 새로 바뀐 임대인이 지난 7월쯤 “내가 사기당해 깡통전세를 매입했으니 보증금은 못 준다”고 연락해 왔다. 전세 만기를 3개월 앞둔 시점에서다. 이씨는 임대인을 상대로 소송을 낸 상태다.

이씨는 “처음으로 독립해 구한 집인데 막상 피해자가 되니 너무 막막하다”고 했다. 부동산 계약을 처음 해봤다는 이씨는 전세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근저당 설정 여부를 꼼꼼히 확인했다고 한다. 전입신고도 하고 확정일자도 받았다. 그럼에도 깡통전세의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소송까지 해보게 됐다는 이씨는 “언제 열릴지도 모를 재판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니 하루하루가 불안하다”고 했다.

서울 천호동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40대 직장인 김아무개씨는 보증금 1억7800만원이 묶여 있다. 김씨는 “대출을 전혀 받지 않고 사회 초년생 때부터 내 힘으로 모은 전 재산”이라고 했다. 김씨는 지난 6월 결혼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년 3월에 보증금을 빼서 신혼집을 차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세기간 동안 집주인이 수차례 바뀌더니 현재 임대인과는 연락도 끊겨 버렸다. 뒤늦게 김씨는 자신이 깡통전세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는 “보증금을 못 받으면 다른 집을 구할 여유가 없다”며 “결국 7평짜리 좁은 오피스텔에 아내와 눌러앉게 됐다”고 했다. 김씨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끝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오피스텔 매입을 시도할 생각이다. 이미 깡통전세로 전락한 물건이라 소송 비용과 취득세를 내고 나면 손해는 피하기 힘들 전망이다. 김씨는 “나는 사기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사기꾼과 접촉한 적도 없는데 사기 피해자가 돼버렸다”며 “부동산 투자에는 손도 안 댄 내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절망스럽다”고 호소했다.

정부는 뒤늦게 대책을 내놓았다. 9월1일 국토교통부는 ‘전세사기 피해 방지방안’을 통해 △전세계약 체결 직후 임대인의 근저당권 설정 금지 △전세계약 전 임대인의 선순위 채권 여부 공개 △피해자에 대한 저리 대출·긴급거처 지원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 단 이는 사기를 당한 임차인에게만 초점을 두고 있다. 피해 투자자 A씨와 B씨는 입을 맞춘 듯 “부동산을 사려는 투자자가 세입자 유무를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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