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군부독재 헌법 개정안 부결…‘가장 진보적 헌법’ 무산
  • 장지현 디지털팀 기자 (vemile4657@naver.com)
  • 승인 2022.09.05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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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안 내 ‘다민족 조항’ 등에 국론 분열
4일(현지 시각) 칠레 산티아고에서 새 헌법 개정안을 두고 부쳐진 국민투표가 끝난 이후 한 선거 관계자가 투표용지를 세고 있다. ⓒAFP연합
4일(현지 시각) 칠레 산티아고에서 새 헌법 개정안을 두고 부쳐진 국민투표가 끝난 이후 한 선거 관계자가 투표용지를 세고 있다. ⓒAFP연합

군부독재 시절 제정된 헌법을 개정하려던 칠레 정부의 시도가 국민투표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산됐다.

칠레 선거관리국은 4일(현지 시각)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개표율 75.5% 상황에서 찬성이 38%, 반대가 62%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통과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칠레의 헌법 개정안은 부결됐다.

이번 투표는 과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 정권 시절인 1980년 제정된 현행 헌법을 바꾸기 위해 진행됐다. 지난 2019년 10월 칠레에서는 사회 불평등 해소를 요구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펼쳐졌는데, 이를 기점으로 헌법이 불평등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목소리를 키워 왔다. 이후 2020년 칠레 국민투표에서 국민 78%가 새 헌법 제정에 찬성하면서 개헌 논의는 본격화됐다.

이번에 부결된 개헌안은 국민적 요구에 따라 원주민 권리 보장, 성평등, 기후 변화 등 진보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춰 작성됐다. 다만 일부 조항이 너무 길고 추상적인 데다, 국민적 여론 수렴 없이 급격한 사회변화를 강제하는 규정들이 포함되면서 개헌안을 둘러싼 국론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해당 개헌안은 총 11개 장 388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는 전 세계 헌법 중에서 조항 수가 가장 많은 수준이다.

이에 국민투표를 수개월 앞두고 시행된 여론조사에서는 개헌에 대한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고, 이날 국민투표 결과도 이같은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AP통신은 평론가들을 인용해 “개헌안이 너무 길고 모호하며, 칠레를 다민족 국가로 규정하는 등의 조치가 너무 지나쳤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도 “많은 유권자들이 칠레를 다민족 국가로 정의하는 언어에 반대했다”며 “헌법 개정안을 만든 제헌의회의 좌파 의원들에 대한 우려도 많았다”고 평가했다.

개헌안이 부결되면서 취임 6개월째를 맞은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도 국정 운영에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AP통신은 보리치 대통령이 이번 개헌을 본인의 정치적 부침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왔기 때문에 일부 유권자들은 이 국민투표를 보리치 정부에 대한 국민투표로 여겼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번 개헌안은 부결됐지만 헌법 개정 자체는 새로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국민투표 실시 전 보리치 대통령은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대응 방향에 대한 질문에 “새로운 개헌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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