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신탁사 불공정 약관 판치는데…손 놓고 있는 공정위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2.09.06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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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불공정약관 시정명령’ 무시하는 한국자산신탁…공정위․한국자산신탁 ‘네 탓 공방’만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공정거래위원회 전경 ⓒ시사저널 임준선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공정거래위원회 전경 ⓒ시사저널 임준선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동산 신탁사들의 불공정 약관을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신탁사들이 갑질 계약을 일삼고 있지만, 이를 관리·감독하는 공정위는 신탁사 전반에 걸친 불공정 약관 정비 등 제도 개선에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가 신탁사들의 불공정 약관을 눈감아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국내 1위 부동산 신탁업체 한국자산신탁(이하 한자신)이 대표적인 사례다. 공정위는 한자신 신탁계약서에 담긴 약관과 특약이 불공정 약관이라며, 여러 차례 시정 조치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도 한자신은 공정위의 처분을 비웃듯 여전히 이 약관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각에서는 공정위가 한자신의 불공정 약관을 축소해 시정명령을 의결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한자신의 불공정약관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린 이후 2021년 6월3일 계약한 대전 대성동의 신탁계약서다. 이 한자신 신탁계약서에는 공정위가 시정명령한 시공사 재선정 관련 이의금지 조항과 신탁사 면책 조항이 들어가 있다. 이 외에도 시정권고한 불공정약관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내용을 특약에 담아 ‘부당특약 부존재 상호 확인서’로 법망을 피해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위회가 한자신의 불공정약관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린 이후인 2021년 6월3일 계약한 대전 대성동의 신탁계약서. 이 계약서에는 공정위가 시정명령한 시공사 재선정 관련 이의금지 조항과 신탁사 면책 조항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일고 있다. ⓒ박창민 기자

 

한국자산신탁, 시정조치 3년 넘어도 불공정 약관 사용

6일 시사저널 취재 결과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해 5월 한자신의 불공정 약관에 대해 시정명령을 의결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앞서 2019년 5월 공정위는 한자신이 고객과 체결한 약관 및 특약사항 중 13개 조항을 불공정 약관(무효)이라고 판단해 이 조항들을 수정 및 삭제하도록 하는 시정권고 처분을 내렸다. 당시 한자신은 이의 절차 없이 공정위의 처분을 모두 수용했지만, 뒤에서는 문제가 된 불공정 약관들을 2년 넘게 사용하다가 또 다시 적발된 것이다.

하지만 공정위는 한자신의 불공정약관 13개 조항 중 2개에 대해서만 시정명령을 의결했다. ‘시공사 재선정 관련 이의금지 조항’과 ‘신탁사 면책 조항’이다. 공정위 의결서에 따르면, 이 조항들은 고객의 재산상 이익과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한 불공정 약관이다. 공정위는 “해당 약관을 삭제·수정하도록 권고했지만, 한자신이 정당한 사유 없이 따르지 않았다”며 “다수의 고객에게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해당 약관조항에 대해 사용금지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문제는 공정위가 시정명령을 내린 2개 조항 외에도 시정권고를 받은 불공정 약관들을 한자신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탁자(한자신)의 시공사 재선정에 일체 이의 제기 금지 △수탁자와 시공사의 ‘조치’ ‘신탁재산 처분’ ‘이익유무’에 대해 일체 민·형사상 소제기 금지 △신탁계약이 ‘불법이라도’ 나머지는 유효하다 등의 조항이 그것이다. 2019년 공정위는 이 조항들 역시 불공정 약관이라고 판단했지만, 이후에도 한자신이 이 같은 조항을 계속 사용한 정황이 시정명령 의결서에 첨부된 11개 신탁계약서에서 드러났다.

현재 공정위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한자신 불공정 약관 시정명령 축소 의혹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자신은 시정권고 이후에도 최소 다섯 개 이상의 불공정 약관을 사용했지만, 공정위는 단 두 개 조항만 시정명령을 의결한 것이다. 한자신과 위탁계약을 맺은 고객들은 “한자신이 여전히 불공정 약관 조항들을 문구만 바꿔가면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위탁자와 부당특약부존재 합의서를 작성해 불공정약관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는 형국이다”면서 “그런데도 공정위는 단 2개의 조항에 대해서만 시정명령을 내리면서, 한자신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고 꼬집었다.

심지어 한자신은 시정명령을 받은 이후에도 문제가 된 조항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위 시정명령이 내려진 직후 제주도, 강원도, 경남 양산 등의 현장에서 체결된 한자신 신탁계약서에 따르면, 시공사 재선정 관련 이의금지 조항과 신탁사 면책 조항이 여전히 존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정권고 후 한자신 신탁계약서에 등장한 불공정 약관도 문제다. ‘고의 또는 중과실이 없을 시 수탁자의 책임을 면책’하는 조항과 ‘서울중앙지방법원 관할법원 지정’ 조항이 대표적인 사례다. 책임을 중과실 경우에만 한정하고, 손해배상범위를 축소해 위험 부담을 고객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또 한자신은 자신의 편의에 맞게 관할 법원을 지정해 서울에서만 재판을 받겠다는 의도다.

이 조항들 역시 명백한 불공정약관이다. 공정위는 ‘고의 또는 중과실이 없는 한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민법상 손해배상책임 원칙에 어긋난다며, 2019년 금융위원회에 보낸 ‘금융투자약관 불공정성 관련 검토 의견’에서 이 조항은 무효(약관법 제7조 제2호)라고 못 박았다. 아울러 ‘서울중앙지방법원 관할법원 지정’ 조항 역시 2021년 공정위가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재판관할 합의 조항은 불공정약관이라고 지정했다.

이처럼 한자신이 공정위의 시정조치를 이행하지 않고 있지만, 공정위는 뒷짐만 지고 있다. 특히 시정명령 불이행은 약관법 위반으로 검찰 고발까지 할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시정명령 불이행은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한자신의 불공정약관 사용에 대한 지속적인 민원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위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때문에 공정위 약관심사과는 지난해 말 감사원 감사까지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관리․감독 부처들이 한자신의 불공정약관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공정위 사건 처리 등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공정위는 불공정약관에 대해 시정권고 및 시정명령 처분을 내린 한자신의 이행 결과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아울러 금융투자업자인 한자신은 수정·삭제해 변경된 약관 계약서를 금융위에 신고해야만 사용할 수 있으며, 금융위는 변경된 약관 계약서를 다시 공정위에 통보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자신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불공정약관은 사실상 공정위와 금융위가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신탁사들의 불공정 약관에 대한 공정위의 봐주기식 처분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신탁사들의 갑질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과도하게 신탁보수를 선취하거나 공사비를 대물변제하는 등 시공사는 물론 위탁자와 수분양자 등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정위의 실효성 있는 제재가 전무한 탓에 신탁사가 불공정 약관을 삭제·수정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공정위 안팎에서 부동산 신탁사의 불공정 약관에 대해 실효성 있는 제재방안과 표준토지신탁약정서 제정을 촉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한국자산신탁의 불공정약관에 대해 시정권고 명령을 내린 이후 2019년 8월26일 계약한 광주 서구 쌍촌동의 신탁계약서다. 당시 한자신 신탁계약서에는 공정위가 지적한 불공정약관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한자신(乙·을)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고객(甲·갑)과 시공사(丙·병), 우선수익자(丁·정)에게 불리한 불공정약관들이 곳곳에 있다.
공정위회가 한국자산신탁의 불공정 약관에 대해 시정권고 명령을 내린 이후 2019년 8월26일 계약한 광주 서구 쌍촌동의 신탁계약서. 당시 한자신 신탁계약서에는 공정위가 지적한 불공정약관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박창민 기자

 

공정위 감사까지 받았는데…불공정약관 눈감고 있나

이런 지적에 공정위는 문제가 된 불공정 약관들을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공정위 관계자는 “한자신의 불공정 약관에 두 차례 시정 처분을 내린 건 사실이다. 지난해 말 공정위 약관심사과가 감사원 감사를 받긴 했지만, 문제없이 종결됐다”며 “여전히 이 약관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근거가 있다면 다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공정위 관계자는 “불공정 약관을 심사할 때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며 “약관 해석에 다툼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기업들이 빠져나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공정위가 불공정 약관에 대해 조치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고 토로했다.

반면, 한자신은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한자신 관계자는 “최근 계약서에 문제가 된 약관들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약관을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며 “공정위가 한자신뿐만 아니라 신탁업계 전체에 약관을 변경하라고 지시했으며, 이와 관련되서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 그 전까지는 동일한 약관을 사용할 수는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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