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참수작전에 가위눌린 김정은의 핵 도박
  • 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sj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18 14:05
  • 호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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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핵공격 법제화’로 올가을 한반도 정세 격랑 예고
10~11월 7차 핵실험 가능성도

트럼프 집권 시기인 2019년 10월말 미국은 시리아 북서부에서 특수작전을 펼쳐 극단주의 무장조직인 ‘이슬람국가(IS)’의 수장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제거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시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고 간밤에 백악관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본 긴박했던 작전 상황을 공개했다. 트럼프는 “미군에 쫓기던 알바그다디가 겁에 질려 개처럼, 겁쟁이처럼 죽었다”며 “부인과 3명의 자녀도 함께 사망했다”고 밝혔다. 마지막 순간 비밀통로로 처자식과 함께 도주하면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는 구체적 설명도 덧붙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런 이례적 행보는 당시 큰 관심을 끌었고,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북·미 정상회담의 상대였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다분히 겨냥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그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미온적 태도로 결렬된 상황에서 평양 측에 ‘언제든 참수작전이 가능하다’는 경고 메시지를 던진 것이란 해석이었다. 공교롭게도 김 위원장 또한 부인 리설주와 어린 세 자녀를 두고 있다.

9월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공격당하면 자동적으로 핵 보복’ 명시

물론 당시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참수작전을 크게 신경 쓸 국면은 아니었다. 북·미가 냉랭한 관계였지만 트럼프와 친서를 주고받는 상황인 데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을 향한 대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졌기 때문이다.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준 셈이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 시절 유사시에 대비해 김정은 참수작전 계획을 짰던 군과 정보기관 인사들은 줄줄이 징계성 조사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3년 만에 기류는 확 바뀌었다. 지난 5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미 대북 공조와 동맹 복원에 초점이 맞춰졌고, 북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한 제재와 응징 태세도 최고 수위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합동 군사연습이 재개돼 김 위원장이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한미 훈련이 시작된 8월16일 이후 김 위원장이 20일 가까이 공개 활동을 접고 은둔에 들어간 것도 북한 지도부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김 위원장이 이런 한미의 압박을 겨냥해 전격적으로 꺼내든 대응 카드가 ‘핵무력 정책’ 법령이다. 9월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7차 회의에서 채택된 이 법안은 △핵무력 지휘통제 △핵무기 사용 결정의 집행 △핵무기 사용 원칙 등 모두 11개 항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북한이 보유한 핵을 어떻게 관리하며 언제, 어떤 절차로 사용하느냐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은 국무위원장의 유일적 지휘에 복종한다”면서 “국무위원장은 핵무기와 관련한 모든 결정권을 가진다”고 명시했다. 이는 국무위원장이자 노동당 총비서인 김정은이 북한에서 갖는 절대 권력자로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은 시정연설의 핵심도 결국 ‘짐이 곧 국가이자 핵’이란 뜻이다.

주목되는 건 핵무기의 사용 조건을 규정한 제6항이다. 북한은 여기에서 대북 핵공격이나 대량살상무기(WMD) 공격이 감행되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핵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공격이 이뤄진 때는 물론 임박했다고 여겨질 때도 핵을 쓸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또 전쟁 확대와 장기화를 막고 전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도 핵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김 위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핵버튼을 누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참수작전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오랜 스트레스를 덜어낼 항목도 곳곳에 촘촘하게 박아넣었다. ‘국가지도부와 핵무력 지휘 기구에 대한 공격이나 임박 판단’을 핵무기 사용 요건으로 제시해 김정은을 겨냥한 위해 움직임에 적극 대처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특히 핵 지휘통제 시스템이 위험한 처지에 빠지면 “사전에 결정된 작전방안에 따라 도발 원점과 지휘부를 비롯한 적대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한 핵 타격이 자동적으로 즉시 단행된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김 위원장과 수뇌부를 공격하면 핵 보복이 사전에 수립된 프로세스에 따라 즉각 단행된다는 경고다. 이 법령은 핵 사용 결정 및 시행과 관련해 “핵무기 사용 명령은 즉시 집행한다”고 밝혀 중간 단계나 이행 과정에서 다른 판단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더 이상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북 협상은 어려울 전망

김 위원장은 법령 채택이 이뤄진 9월8일 같은 장소에서 가진 시정연설을 통해 “우리의 핵을 놓고 더는 흥정할 수 없게 불퇴의 선을 그어놓은 여기에 핵무력 정책의 법화(法化)가 가지는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더 이상 비핵화 협상은 없다는 이 같은 언급은 문재인 정부가 대북특사 방문과 남북정상회담 등의 과정에서 국민에게 설명했던 김 위원장의 ‘비핵화 용의’와는 거리가 있다. 트럼프 집권 시기에 비핵화를 내세워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만난 것도 비록 당시엔 대북 제재 완화와 체제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비핵화 협상에 나섰을지는 몰라도, 지금 결과적으로는 결국 핵 보유를 위한 시간 벌기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문제는 핵법령화 국면까지 치달은 김정은의 핵 드라이브에 한미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비핵화를 전제로 대북 제재의 문턱을 낮추고, 대북 지원이나 국제협력을 돕는 기존의 협상 테이블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 전문가 그룹뿐 아니라 일부 북핵 관련 외교안보 당국자 입에서도 나온다는 측면에서다.

김정은 위원장은 연초부터 만지작거려온 7차 핵실험 버튼을 아직 누르지 않고 있다. 함북 길주군 풍계리의 핵실험장에 쏠린 관심이 장기화하면서 피로도가 높아진 데다 자칫 한미와 국제사회가 찰떡공조를 하는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눈길을 끄는 건 김 위원장이 전술핵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정연설에서도 그는 “전술핵 운용 공간을 부단히 확장하고 적용 수단의 다양화를 더 높은 단계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이 조만간 전선 지역에 전술핵 배치를 완료했다고 선언하거나, 수 내지 수십 kt(킬로톤·1kt은 TNT 100톤의 폭발력) 규모의 소형 전술핵 실험에 나서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난 1월 노동당 8차 대회에서 자신이 공언한 전술핵과 투발수단 개발의 이행이란 의미도 있다.

핵법령 선포까지 내달린 김 위원장이 어느 시점에 무슨 카드를 꺼내들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현재로서는 10월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7주년이 주요 계기로 꼽힌다. 당(黨)국가 체제인 북한의 특성상 올해 최대 정치행사인 당 창건 기념일에 이벤트를 벌임으로써 체제 결속과 함께 주목도 높은 대남·대미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정권 수립 기념일인 지난 9·9절 행사는 축하공연과 에어쇼로 채워진 만큼 당 창건 기념행사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발사체를 선보이거나 화성-17형 또는 북극성 계열의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시험발사할 공산도 있다.

11월8일로 예정된 미 대통령 중간선거도 김정은이 주시하고 있을 사안이다.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미국 내 여론평가가 어떻게 귀결되느냐에 따라 한반도 정세에 적지 않은 변화가 예고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선거를 전후해 북한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핵이나 미사일 관련 도발이나 추가 입장 표명을 통해 일정한 영향을 미치려 시도할 수도 있다.

특정한 시점이나 계기가 아니더라도 한반도와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의 북한 동향이나 도발 움직임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위원장의 ‘핵 포기 불가’ 선언으로 한미 당국이 새로운 대응전략을 모색해 나가는 상황에 북한은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는 북핵 문제를 정책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외교·국방 차관급 대화채널인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가동에 이어 확장억제수단운용연습(TTX)도 연내 실시한다는 입장이다. 북핵 위협과 핵 사용 임박, 핵 사용 등 3가지 단계별 군사적 대응을 강구하기 위한 훈련이란 점에서 북한이 강력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김 위원장이 공언한 핵무력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대북 예방타격과 응징·보복이 다뤄진다는 점에서 충돌도 예상된다.

다만 10월16일로 잡힌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김 위원장에게는 신경 쓰일 수 있다. 이번 행사는 당장(黨章·당헌) 개정을 통해 시진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3연임 보장과 리더십 굳히기를 도모할 중요한 계기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서 추가 핵실험이나 한반도에서의 도발로 불안을 조성하는 건 시진핑과 중국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 북한이 7차 핵실험에 나서지 못하는 게 중국의 자제 권고 때문이라는 관측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북한 정권 수립 74주년(9ㆍ9절)을 맞이해 9월8일 평양 만수대 기슭에서 경축행사 가 진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월9일 보도했다.ⓒ연합뉴스

북한, 중국 눈치 보지 않고 핵 도발 감행할 수도

물론 작심한 듯 핵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김 위원장이 중국의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겠다고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핵 법령화 등에 한미가 강도 높은 압박에 돌입하는 국면이 전개될 경우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간 김정은의 리더십이 크게 스타일을 구길 것이란 점에서다. 북한은 핵실험 등에 있어 중국과 불협화음을 낸 경우가 적지 않다.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과 북핵 관련 법령 채택은 북한의 도발 행보를 알리는 전주곡이 될 수 있다. 노동당 창건일과 중국 공산당 대회, 미 중간선거 등이 빼곡히 적힌 캘린더를 보며 김 위원장은 체제의 명운을 건 치밀한 핵전략을 고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칫 10월 이후 한반도에 평양발 핵 도발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핵을 가진 가난한 나라’를 세습받은 38세의 청년지도자 김정은의 핵 도박 가능성에 따라 올가을 한반도 정세는 격랑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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