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왕이 ‘조용히 있으면’ 그를 지지할 것”
  • 사혜원 영국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18 13:05
  • 호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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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영국 군주제에 대한 위기감 커져
‘군주제 반대’ 여론 점점 커지는 가운데, 애도 분위기 속 찰스 왕의 인기 일시적 오름세

현지시간으로 9월8일 오후 6시30분, 속보가 영국 전역을 침묵에 빠트렸다. 1952년 왕위에 올라 혼란과 변화의 시기에 영국을 통치한 영국의 최장수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뉴스였다. BBC 채널의 상징적인 붉은색 로고는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국민들은 파티를 포함한 모든 이벤트를 취소했다. 충격에 휩싸인 런던은 퇴근시간임에도 놀랍도록 고요했다. 영국 왕실의 상징이자, 더 나아가 영국의 상징인 여왕의 죽음은 영국인들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시선은 이제 왕위 계승자인 아들 찰스 왕에게 쏠렸다. 지난 6월 진행된 ‘유고브’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왕 개인에 대한 영국 국민의 높은 지지도와는 달리, 영국 국민의 34%만이 찰스 당시 왕세자가 차기 왕이 되는 것을 지지했다. 실제 여왕의 사망 소식과 동시에 영국인들은 찰스 왕에 대한 반발과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여왕이 96세의 나이까지 굳이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사망 소식을 접한 국민들이 9월12일 런던의 버킹엄 궁전으로 가려고 줄을 서있다.ⓒAFP 연합

군주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 점점 증가해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영국의 새 군주로 등극한 이후 며칠 동안 찰스 왕에 대한 지지율은 상승하고 있다.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된 이후의 첫 여론조사에 따르면, 63%의 영국 국민이 그가 “좋은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영국 에든버러의 시민 엘리 머튼(52)은 “찰스는 변화를 원활하게 감독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군주제는 우리 정치체제의 중심점이다. 군주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찰스 왕에 대한 영국 국민의 시선이 따뜻하게 바뀐 분위기는 9월13일 공개된, 찰스 왕이 공식 석상에서 서류에 사인하다가 펜에서 잉크가 너무 많이 나오자 짜증을 내는 영상에 대한 반응에서도 볼 수 있었다. ‘경솔하고 준비가 덜 되었다’ ‘우아한 여왕과는 딴판이다’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해외 네티즌과는 달리, 영국 네티즌은 ‘어머니를 잃고 힘든 찰스를 이해해 줘야 한다’는 동정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오히려 화를 내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느꼈다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찰스 왕에 대한 이러한 우호적인 시선은 여왕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영국 국민의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9월12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새 왕을 만난 이완 카마이클(26)은 “우리는 지금 왕실의 과도기에 있다. 찰스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을지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며 “그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왕으로서의 찰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찰스 개인에 대한 호감도가 오히려 높아졌음에도 지금 영국 내에서는 군주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의 비율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군주제에 대한 세대 간 격차는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을 보이며, 젊은 층은 군주제에 대해 훨씬 더 무관심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영국 스트래스클라이드대의 커티스 정치학 교수는 “영국 국민 대부분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들이 아는 유일한 군주였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애도 뒤에는 군주제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예측했다. 영국이 비록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군주제를 유지했다고 해도, 현대 민주주의에서 군주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중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영국 국립 사회연구센터는 영국의 ‘사회적 태도(British Social Attitudes)’ 설문조사를 통해 영국 국민에게 왕실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혹은 중요하지 않은지를 정기적으로 질문했다. 1983년 첫 설문조사가 진행되었을 때, 영국 국민의 65%는 군주제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very important)”고 답했고, 다른 21%는 “제법 중요하다(quite important)”고 답했다. 즉 86%라는 거의 모든 국민이 ‘군주제 지지자’로 나타나자, 아예 사회적 태도 설문조사에서 이 질문이 한동안 빠졌을 정도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질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2년 여왕의 세 자녀가 이혼하는 등 왕실이 스캔들로 시끌벅적해지자, 군주제에 대한 질문은 다시 설문조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생각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왕실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면, 1992년 이후에는 개별 사건에 대한 반응에 따라 대중의 태도가 바뀌는 경향이 설문조사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가장 최근인 2021년 설문조사 결과는 꽤나 심각하다. 영국이 군주제를 갖는 것이 ‘매우’ 또는 ‘제법’ 중요하다고 답한 사람은 합해서 55%에 불과한 반면, 군주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답한 사람은 43%에 달했다. 이처럼 군주제에 대한 지지도가 역대 최저치로 떨어진 시기에 찰스 왕은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군주제에 대한 향후 영국 국민의 지지는, 찰스 왕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으로 판단된다.

ⓒAP 연합
찰스 왕과 생전 엘리자베스 여왕ⓒAP 연합

새 왕이 보여줄 안정감이 지지율의 관건

브렉시트, 코로나19, 보리스 전 총리의 파티게이트로 인한 실각 등 최근 격변의 시기를 겪은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라는 ‘안정의 상징’을 잃고 말았다. 아마도 영국 왕실에 대한 국민의 애정과 지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왕실이, 그리고 찰스 왕이 보여줄 수 있는 안정감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새 국왕 찰스에게 영국인들이 기대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그가 조용히 있는 한 새로운 왕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즉위 이후 70년 동안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그 와중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역사적 유통기한이 지난’ 제도를 보존하는 몹시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왕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후계자인 찰스 왕이 군주제의 상징적인 역할을 지속하기 위해 국민의 요구대로 구설이나 사회적 논쟁 없이 ‘조용히’ 있을 것인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왕이 되기까지 다른 어떤 후계자보다 오래 기다린 찰스 왕은 기후변화 등 다양한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고,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는 지난 70년을 통치하는 동안 개인적인 의견을 숨긴 채 인터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과 대조적인 태도다. 하지만 되고 나서 한 첫 연설에서 찰스 왕은 “어머니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거듭 말했고, “나는 ‘새로운 역할에 걸맞게’ 당연히 바뀔 것”이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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