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조차 죽지 않는 여야, 변화의 싹이 안 보인다 [유창선의 시시비비]
  • 유창선 시사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19 13:05
  • 호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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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침묵’ 깨고 ‘비상사태’ 선언할 정치인들 다 사라져…판 바꿀 새 인물들 등장시켜야

“믿고 지지할 정당이 없다.” 요즘 우리 정치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이런 푸념을 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지난 3월 대선의 마지막 순간에 어느 한쪽을 선택했던 마음들이 몇 달 만에 다시 부동화되는 모습이다. 대선을 치를 때는 ‘전쟁 같은 선거가 끝나고 나면 그래도 무엇인가 달라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건만, 실낱같은 그런 기대도 속절없이 무너진 지 제법 되었다.

집권당이 되자마자 집안싸움에 비대위 체제로 들어가는 전무후무한 광경을 보인 국민의힘은 말할 것도 없다. 정권을 내놓고도 여전히 의석 숫자를 무기로 집권당 행세를 하는 더불어민주당의 독선도 달라진 것이 없다. ‘민주당 2중대’ 프레임에 자승자박한 채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정의당의 현실도 암담해 보인다.

2월3일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열린 대선후보 토론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기념촬영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오른쪽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국회사진취재단

신선한 인재 발탁 못 한 윤 대통령의 책임 커

돌아보면 정치 현실이 절망적이었던 때는 우리 정치사에 종종 있었다. 그래도 어느 한구석에서는 그런 정치를 바꾸려는 몸부림들이 있곤 했기에 국민은 정치에 대한 한 가닥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과거와도 많이 달라 보인다. 오늘의 우리 정치가 더욱 참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진영 간 무한대결의 정치를 넘어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가려는 싹이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정치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개탄은 이어지지만 여야 정치권은 정쟁과 파벌싸움으로만 소란할 뿐, 이런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아우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침묵의 카르텔이 여야 정당들을 가둬두고 있다.

금쪽같았던 시기에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이 보여준 혼돈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새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 동력이 되었어야 할 여당이 오히려 동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계속된 이준석 전 대표와 ‘윤핵관’의 대결은 여당을 극심한 분열과 혼란에 갇히게 만들었다. 이 전 대표는 이기주의와 아집으로 가득 찬 정치인의 모습만 보이다가 구성원들의 신뢰를 잃어 대표직을 박탈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준석을 내려오게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윤핵관이 대안으로 인정받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윤 대통령에게는 윤핵관들이 정권을 함께 세운 공신이며 파트너였겠지만, 국민들 눈높이에서는 과거 정치를 상징하는 인물들일 뿐이었다. 이미 윤핵관은 민심과 어긋나는 언행들로 여러 차례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그들을 앞세워 국정을 운영하려 했다면 애당초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모습이었다. 뒤늦게나마 대통령실에서 윤핵관 라인을 솎아내고 윤핵관과의 거리두기로 선회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준석도 윤핵관도 대안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여당 내에 미래형 리더십을 보유한 다른 대안적 인물이나 세력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대안 부재의 상황이다. 이준석도 내려오게 하고 윤핵관들도 물러서게 한들, 그들이 비운 자리를 채울 대안적 리더십이 마땅치 않은 것이 국민의힘이 처한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는 윤 대통령의 책임이 작지 않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 뛰어들면서 정치를 시작한 신인이었기에 누구에게도 정치적 빚이 없었다. 국민에게 불신받는 기존 질서에 갇히지 않고 우리 정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질 만도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선택한 것은 익숙하고 편한 사람들과의 동거였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실과 내각 인사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난 윤핵관과 검찰 편중 인사는 윤 대통령의 안이한 인식이 낳은 결과였다. 만약 윤 대통령이 집권 초에,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국민에게 신선감을 줄 수 있는 윤희숙, 금태섭 같은 정치인들을 껴안고 전진 배치하는 인사를 했다면 윤석열 정부에 대한 평판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새롭고 큰 그림을 그리는 정치인이 되지 못했다.

정권은 내놓았지만 국회에서는 여전히 집권당으로 군림하고 있는 민주당의 앞날 또한 암담해 보인다. 여권 세력은 여러 난맥을 드러내다가도 여론의 비판이 확산되면 그래도 겁을 내고 고치려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한다. 그런데 민주당은 아무리 비판을 해도 요지부동이다. ‘검수완박’의 입법독주에 대한 역풍을 맞아 6·1 지방선거까지 참패를 당했음에도, 민주당은 여전히 무소불위의 국회권력이라는 힘을 과시하곤 한다.

“남의 부인을 정치 공격의 좌표로 찍는 행위가 부끄럽고 쫀(좀)스럽다”(조정훈 시대전환 의원)는 지적에도 갑작스럽게 특검법과 국정조사로 ‘김건희 때리기’에 올인한다. 정권의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 타격하는 정치 기술자들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민주당 역사에서 ‘역대급 강성’ 지도부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게 민주당은 갈수록 강경해지는 정치로 질주하고 있다.

 

野, 정권의 약점만 타격하는 정치 기술자 돼

민주당이 이토록 달라질 줄 모르는 정당이 된 데는 이재명 대표의 책임이 크다.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 패배의 큰 책임이 따르는 이 대표였건만, ‘방탄’ 논란을 무릅쓰고 국회의원에 이어 당 대표 자리까지 거머쥐었다. 민주당은 최고위원들 또한 친이재명계가 절대 다수인 ‘이재명당’이 되었다. 이 대표에 대한 수사와 기소에 따른 ‘사법 리스크’도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당을 세우는 재건축이 아니라 인테리어만 다시 한 채 관성대로 질주하는 길을 민주당은 가고 있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시절의 민주당은 이러지 않았다. 민심을 무섭게 알고 균형의 길을 가던 민주당이었다. 그러던 당이 ‘문재인 민주당’ 시절부터 철저하게 진영정치를 추구하는 당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문재인을 지키자’며 팬덤층이 대거 권리당원으로 입당해 당의 의사를 좌우하게 되었다. 당의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은 팬덤의 문자폭탄에 시달리다가 공천도 받기 어려운, 하나의 의견만이 허용되는 당이 돼버렸다.

이런 환경에서는 극단적 진영 대결의 정치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공존의 정치를 내건 새로운 정치인들이 설 자리는 없다. 오늘의 정치 상황에 대해 어느 당의 책임이 더 큰가를 따지는 일은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여야가 함께 나쁜 정치를 하고 있으니 서로가 상대편을 위안 삼아 안이한 정치적 나태의 늪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어느 한쪽이라도 먼저 진정한 환골탈태의 모습을 보인다면 다른 한쪽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가 그 모습 그대로이니, 그냥 이대로 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함께 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비겁한 침묵’을 깨고 한국 정치의 ‘비상선언’을 할 정치인들은 이제 정말 다 사라진 것일까. 그렇다면 타성에 젖은 정치인들을 교체해 정치판을 뒤바꿀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해야 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은 죽었지만 새것은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 정치에서는 낡은 것조차도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있다. 거기에 눌려 새것이 잉태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정치가 무한 연장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1년 반 뒤에 22대 총선이 있음을 기억하자.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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