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신당역 사건이 남긴 또 하나의 숙제 [임명묵의 MZ학 개론]
  • 임명묵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25 08:05
  • 호수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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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만 가는 안전에 대한 감수성 위해 ‘국가의 통제·감시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사회적 합의 필요

9월14일 서울 지하철 신당역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가해자 전주환은 불법 촬영과 스토킹으로 피해자를 겁박하고 있었고, 지난 8월 결심공판에서 징역 9년을 구형받았다. 하지만 당시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법원에서 기각되었고, 그사이 가해자는 피해자의 근무 정보를 확인해 피해자가 여자화장실을 순찰하는 틈을 노려 흉기로 살인을 저질렀다. 가해자의 명확한 악의, 가해자를 막지 못했던 국가 치안 시스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피해자 등 모든 정황이 맞물려 신당역 살인 사건은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9월21일 ‘스토킹 살인 사건’이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시사저널 박정훈

사회 갈등과 결부되면 본질 벗어난 논란만

신당역 살인 사건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비극이었지만, 사건과는 별개로 또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 사건마저도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를 할퀴고 지나간 젠더 갈등의 맥락에서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 직후 이 사건을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젠더 폭력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논평들이 이어졌다.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잔인한 폭력성을 지닌 가해자가 비뚤어진 성의식을 여성에 투사하다 발생한 비극으로 생각한다. 아마 대다수 시민이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혐오의 시대’에는 이런 비극조차도 인터넷 커뮤니티의 전쟁 차원에서나 논해지고 공동체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젠더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의제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공동체가 공유하는 안타까운 비극 앞에서는 일종의 ‘진영 논리’를 내려놓고 다 같이 추모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 분위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는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만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심각한 사안이 기존의 사회 갈등에 결부되어 해석되면서 소모적으로 흘러가버리면 더더욱 본질을 벗어난 논란만 부추기게 될 것이다. 비극적 사건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하면 이런 끔찍한 흉악범죄를 더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을지, 슬픔 속에서도 건설적인 대안을 논해야 한다.

먼저 국민적 공분을 사는 이번 신당역 스토킹 사건이 발생한 상황에서 꺼내기는 조심스럽지만, ‘살인 사건’만으로 한정했을 때 한국의 치안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검찰청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살인 건수는 2010년 2.5명이었으나 2020년에는 1.6명을 기록하고 있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 통계에서는 이보다 적어 2020년 기준으로 0.6명이다. 물론 국제적인 비교에서는 집계 기준의 차이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다. 젠더 폭력 통계를 팩트체크한 2021년 한겨레21의 기사 ‘남성이 여성보다 많이 살해됐는데요?’에서는 집계 기준에 따라 한국의 여성 살해 피해자 지표가 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범위는 OECD 38개국 중 9위에서 25위까지다.

하지만 통계를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한국이 유난히 살인 사건, 혹은 여성 대상 살인 사건이 다른 나라에 비해 ‘특출나게’ 많이 일어나는 국가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다수 선진국에서 인구 10만 명당 살인 건수는 1건을 밑돈다. 이미 특정한 정책으로는 급격한 개선을 이루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해석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시민들의 인식과 요구가 지표와 반드시 비례하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은 객관적 숫자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사와 이미지에 반응하는 존재다. 스티븐 핑커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인해 인간 사회에 장기적으로 평화가 찾아왔다고 역설했지만 많은 이가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대사회는 미디어의 발달 덕분에, 끔찍한 범죄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사건을 접하면서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은 전혀 ‘비합리적’이지 않다. 인간은 정서를 통해 움직이며, 점점 민감해지는 감수성에 따라 더 안전한 치안을 요구하게 된 것은 대다수 현대인이 신체적 안전을 누릴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안전한’ 상황 속에서도 안타깝게도 범죄는 일어나기에, 범죄 피해자 입장에서 통계 수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1년에 10만 명당 0.6명이 피해자가 된다는 통계는 한 사람이 범죄로 인해 겪는 피해와 고통에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다. 그 고통을 같이 짊어져야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더 안전한 사회에 대한 요구를 통계를 들어 일축할 것까지는 없는 일이다. 어차피 모든 발전은 주관적 인식의 변화와 더 높은 기준에 대한 열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범죄 예방 위한 더 강력한 시스템, 가능할까

통계는 계속 높아만 가는 감수성의 정당성보다도 그 목표를 실현할 수단을 논할 때 진정으로 중요해진다. 한국의 살인 통계는 대다수 선진국의 수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당 통계는 CCTV가 보편화되고 전국적인 경찰 조직과 교정, 처벌 시스템을 갖춘 국가에서 대체로 발생하는 수치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이전의 더 높았던 흉악범죄 수준은 지금의 감시와 처벌 시스템을 통해 예방하고 억누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더 높은 수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또 다른 수단을 추가로 요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번 신당역 사건은 스토킹 범죄를 더 강력하게 처벌하고, 가해자를 피해자와 선제적으로 분리시키고, 지하철역의 순찰을 더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게끔 바꾸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범죄를 일으킬 개연성이 높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감안하면,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더욱 일반론적이고 근원적인 개입 조치들이 시민들에 의해 계속 요구될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2020년 수면 위에 올라온 n번방 사건은 불법 촬영물을 비롯한 디지털 영역에서의 범죄가 새로운 위협을 제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술 발전과 그 기술의 악용, 그 악용을 막기 위한 영원한 경주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앞으로 더욱더 깊은 수준에서 범죄에 미리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만 할 것이다. 범죄 소인이 많은 이들을 사전에 탐지할 수 있는 시스템부터, 그들의 현실과 사이버 공간에서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말이다.

문제는 새롭게 요구될 이러한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자유주의 아래서 국가 권력에 가하는 제약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는 일찍이 근대사회를 ‘감시와 처벌’이라는 키워드로 분석한 바 있다. 통치 기구의 폭력성과 별개로, 어쨌든 그 기구가 현대인에게 이전과 비교해 더 높은 수준의 안전을 제공해준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높아져만 가는 우리의 안전에 대한 감수성을 위해서, 우리는 어느 수준까지 국가의 통제와 감시를 용인할 수 있을 것인가.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합의가 갈수록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임명묵 작가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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