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혹한기’에도 투자 시계는 빨라졌다
  • 이호길 시사저널e.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27 10:05
  • 호수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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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반도체 시장, 소비자용에서 서버용으로 ‘중심 이동’
삼성·SK하이닉스·마이크론·인텔 등 공장 증설 및 투자 확대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반도체 수요 둔화로 업황이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기업들은 중장기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반도체 업황 주기가 기존 4년에서 2년 내외로 짧아져 불황기에도 투자를 확대하는 모양새다. PC와 모바일 등 소비자용 IT(정보기술) 기기 중심의 메모리 반도체 응용처가 서버와 데이터센터 등 기업용 제품으로 전환되면서 반도체 사이클이 단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도체 업황은 최근 공급 과잉과 재고 증가에 직면한 메모리 시장을 중심으로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 여파로 수요가 위축되면서 급락하는 추세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대표적인 메모리 반도체인 D램과 낸드플래시의 3분기 소비자용 제품 가격이 2분기 대비 13~18%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업 간 계약에 활용되는 고정거래가격도 D램은 지난해 10월, 낸드플래시는 지난 6월부터 각각 하락세로 돌아섰다.

ⓒ연합뉴스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반도체 수요 둔화가 최근 계속되지만 업계는 오히려 투자를 강화하고 있어 주목된다. 사진은 충남대 반도체실험실을 찾은 박순애 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연합뉴스

반도체 사이클, 4년에서 2년 내외로 짧아져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 위기가 내후년까지 장기화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반도체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반도체산업 경기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6.7%는 현 상황을 위기로 진단했고, 58.6%는 내후년 이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수요 위축과 미·중 갈등 심화 등으로 글로벌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경계현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사장)은 9월7일 평택공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반도체) 사업이 어렵다”고 인정하면서 “올 하반기도 안 좋을 것 같고, 내년도 지금으로 보면 그렇게 좋아질 모멘텀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통상 이 같은 불황기에 반도체 기업들은 업황이 반등할 때까지 투자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시장의 약세 조짐이 본격화된 2019년 초 대외환경 불확실성을 이유로 증설 투자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최근 행보는 이와 상반된다. 불황기에도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평택캠퍼스 P3 공장에서 낸드플래시 양산에 돌입한 데 이어, 3개의 반도체 생산시설을 추가로 건설할 예정이다. 현재 증설이 이뤄지고 있는 P4 라인은 P3 공장보다 건설기간이 10% 이상 빠르다. 현재 추세라면 내년 상반기 중 완공이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을 위해 용인 기흥캠퍼스에 2028년까지 약 2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SK하이닉스 역시 충북 청주에 신규 반도체 생산라인인 M15X 착공 시기를 예정보다 앞당기기로 했다. 향후 5년간 공장 건설과 생산설비 구축에 15조원을 투입해 선제 투자에 나설 계획이다. 2025년 완공 목표로 신규 M15X는 기존 청주 M11, M12 두 개 공장을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로 조성된다.

미국 반도체 제조사들의 움직임도 빠르다. 마이크론은 아이다호주 보이시에 D램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150억 달러(약 20조8000억원)를 투자한다. 현재 10% 수준인 미국 내 D램 생산비중을 40%로 높일 계획으로 2025년 가동이 목표다. 인텔도 최근 오하이오주 신규 반도체 공장에서 기공식을 개최했다. 해당 공장 건설에는 200억 달러(약 27조7000억원)가 투입된다.

코로나19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디지털 전환 흐름으로 메모리 시장이 재편되면서 기업들의 투자가 경기 변동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기준 D램 주요 응용처는 모바일(33.7%) 비중이 제일 높았고, 서버(27.5%)와 PC(20.3%)가 뒤를 이었다. 지난해에는 서버(32%)가 가장 큰 수요처로 부상했고 모바일(22.4%)과 PC(15.4%)는 각각 11.3%포인트, 4.9%포인트 하락하면서 비중이 낮아졌다.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로 메모리 반도체의 무게중심이 소비자용 제품에서 서버 시장으로 이동하면서 반도체 사이클이 빨라졌고, 불황기에도 투자 확대 필요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단기적 부침은 있겠지만, 데이터 사용량은 장기적으로 우상향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며 “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신규 공장을 사전에 준비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단기적 투자 조정과 달리 중장기 시황을 보고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업황 사이클이 기존 4년에서 2년 내외로 짧아졌다고 분석한다. 이에 따라 최근 침체 국면에 접어든 반도체 시장도 내후년부터 서서히 회복되고 2025년에는 반등할 것으로 전망된다. 올 하반기 업황 악화 이후 2년여 만에 회복이 가능할 것이란 관측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메모리 시장 재편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사이클 주기를 정확하게 숫자로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주기 자체가 짧아진 건 맞다”고 말했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 사이클의 경우 ‘올림픽 사이클’이라고 해서 4년 주기로 호황기가 찾아왔는데, 이제는 그 주기가 짧아졌다”면서 “메타버스와 데이터센터 등에서 높은 수준의 수요 증가가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인플레이션 등의 요인으로 경기 침체가 내년까지 이어진다는 불안감이 현재 시장에 팽배하다. 그럼에도 2024년 이후에는 경제가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가 있고, 장기적으로 반도체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반도체 기반시설을 갖추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건물을 지어놓은 뒤 장비 반입은 업황에 따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투자를 단행한 것으로 한 교수는 전망했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의 경우 글로벌 공급사가 10년 전에는 수십 개 이상이었지만 지금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개사로 줄어들었다”며 “공급이 제한되면서 메모리 사이클이 더 빨라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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