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의 일상 담은 연극 《82년생 김지영》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27 11:05
  • 호수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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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소설과 영화 이어 연극으로 다시 풀어내
소유진의 감정에 북받치는 열연, 객석에 큰 울림 줘

올해 추석을 앞두고 한국 사회에서 유교 문화 교육기관으로 명맥을 이어온 성균관이 놀라운 발표를 했다. 이른바 ‘추석 차례상 표준안’으로 그간 차례상의 공식 예법으로 알려진 ‘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조율이시’(棗栗梨枾·대추·밤·배·감)는 옛 문헌에는 없는 내용이며, 상을 차릴 때 음식을 편하게 놓으면 된다고 한 것이다. 잘못 알려진 유교 의례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은 물론,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을 10가지 내외로 줄임으로써 가정 내 불화와 스트레스를 막고 명절을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뮤지컬 《82년생 김지영》 무대 모습ⓒ스포트라이트 제공
뮤지컬 《82년생 김지영》 무대 모습ⓒ스포트라이트 제공

124년 전 여권통문 발표된 날 연극 개막

이 중 가장 이목을 끈 부분은 명절 제사 음식 중 빠지지 않았던 전에 관한 것이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사계전서》 제41권 의례문해에는 밀과와 유병 등 기름진 음식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기록이 있다”고도 지적하며 가족 입맛과 형편에 따라 고기나 생선을 올리지 않아도, 전을 부치지 않아도 괜찮다고 부연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성균관의 이런 발표는 당장 큰 반향을 불러왔다. 명절 때마다 음식 마련이 주로 여성들의 일이다 보니 명절이 끝나면 이로 인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됐기에 이 발표의 영향으로 실제로 이번 추석부터 가정마다 전 부치기가 줄어들었다는 뉴스도 등장했다.

1898년 9월1일. 북촌 양반 여성들이 이소사(李召史), 김소사(金召史)의 이름으로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발표했는데 여성의 평등한 교육권, 정치 참여권, 경제활동 참여권이 명시됐다. 현재 여성가족부에서 시행 중인 양성평등기본법에도 이 법의 취지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인권선언으로 불리는 여권통문이 발표된 9월1일을 기린다고 언급돼 있다. 한 세기도 훨씬 지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위치는 개선됐고 구조적 양성평등은 이미 구현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성균관의 이번 발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변화된 시대지만 여전히 구조적으로 성별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힘을 얻고 있다.

124년 전 여권통문이 처음 발표된 9월1일 서울에서는 한 편의 특별한 연극이 개막했다. 조남주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무대로 옮긴 연극 《82년생 김지영》(극본 김가람, 연출 안경모)이다. 이 작품은 엄마에게는 딸로서, 남편에게는 아내로서, 직장에서는 동기이자 부하로서, 그리고 딸에게는 엄마로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1982년 4월1일생 여자 김지영의 이야기다. 지영은 한국 사회를 살면서 일상 속에 여전히 스며들어 있는 ‘남존여비’ 잔재들 속에서 상처받고 때로는 신음하며 살아간다.

사랑스러운 남편을 만나 신혼생활을 이어가던 지영은 딸을 낳고 나서 가사노동에 육아노동이 더해져 직장도 그만두고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낸다. 남편의 관심과 조언이 있지만 일하는 여성으로서 할 일들과 특히 엄마로서 육아에 대한 사명감은 지영을 짓누른다. 결국 출산으로 인한 퇴사로 경력이 단절되고 유모차를 끌고 ‘노키즈 존’ 카페에 갔다가 수모를 당하고 공원에서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마시다가 점심시간에 외출해 근처를 지나는 주변 직장인들로부터 ‘일 안 하고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편하게 커피나 마시는 맘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갑작스럽게 자신이 알고 있는 주변 여성들로 빙의하는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2016년 첫 출간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원작 소설이 김지영이라는 30대 주부의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형식은 지영이 어릴 적부터 겪은 다양한 여성 차별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각 일화들을 엮는 통합적인 스토리나 특별한 결말이 있다기보다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개별적인 사건들을 통해 김지영의 인생을 군데군데 엿보고 유추하는 방식을 취했다. 즉, 원작 소설은 주인공 캐릭터가 살면서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겪으며 전개되는 강력한 서사 위주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김지영’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어머니 세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대한민국 여성 수난사의 총체적 콜라주에 가깝다.

개별 에피소드 중에서 보다 많은 공감대를 일으키는 것 중 하나가 우리 어머니 세대가 특히나 겪었을 에피소드들로 집안의 남자 가족을 위해 사회생활도 희생하고 거기에 가사노동도 더해진 삶이다. 많은 직장 여성이 단지 여자라고 차별받고, 승진도 어려웠으며, 육아 문제로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쉽게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현시점에는 많이 개선되거나 거의 없어졌다고 평가받는 것들도 있지만, 지영의 핵심 고민인 직장인 여성들의 육아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영역이다.

2019년 영화로도 각색돼 국내 관객 367만 명을 동원했다. 영화에서는 에피소드를 최대한 연결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소설과의 차별점으로 김지영(정유미 분)의 회사 재취업 과정과 정신과 치료 과정을 큰 줄기로 내세웠다. 남편 정대현(공유 분)의 달달한 외조도 스크린이 줄 수 있는 매체적 특징을 살려냈다.

뮤지컬 《82년생 김지영》 무대 모습ⓒ스포트라이트 제공
뮤지컬 《82년생 김지영》 무대 모습ⓒ스포트라이트 제공
뮤지컬 《82년생 김지영》 무대 모습ⓒ스포트라이트 제공
뮤지컬 《82년생 김지영》 무대 모습ⓒ스포트라이트 제공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서사 이끌어

이번 연극 무대에서는 이 모든 것을 오롯이 배우가 책임진다. 타이틀롤인 무대의 김지영은 소유진 배우가 맡고 있다(트리플 캐스팅 임혜영, 박란주). 육아 경험이 있는 소유진 배우의 감정에 북받치는 열연은 객석에도 큰 울림을 준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만 무대는 배우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소유진 배우의 복합적이면서 절절한 연기가 공간적으로 제한된 무대와 관객석을 같은 감정으로 적셔주며 연극을 위해 새롭게 구축된 서사를, 중심을 잡고 이끌고 간다.

소설에서의 개별 에피소드를 하나의 통합된 흐름으로 만들기 위해 지영의 반복적인 가사노동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도 등장한다. 이는 무대와 객석이 가까운 연극 무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이번 연극에서는 남편이 지영의 옛 일기를 읽으며 소설에서의 에피소드를 시간적 흐름으로 되짚으며 인생을 함께 회상하며 위로하는 내레이션 방식도 채택했다. 영화에 비해 남편의 비중이 더 커졌고 두 사람의 연애 과정에 대한 묘사와 낭만적인 데이트 장면도 훈훈하게 펼쳐진다. 연극 《82년생 김지영》은 11월13일까지 서울 삼성동 백암아트홀에서 관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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