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의 RE100 선언에 불붙은 ‘친환경’ 전쟁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9.26 12:05
  • 호수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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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100 가입은 이제 선택 아닌 필수”
5대 그룹 총수들 관련 행보에 박차

재계의 ‘환경경영’ 시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RE100(사용전력의 100%를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추구하는 캠페인) 동참을 선언하면서다. 향후 5대 그룹 계열사를 중심으로 RE100 가입이 잇따를 조짐이다. 각 총수의 경영 성적도 친환경 전략 성과에 따라 좌우될 여지가 크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최근 삼성전자의 RE100 가입을 기점으로 상당수 기업이 친환경 경영 전략 수립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9월15일 ‘신(新)환경경영전략’을 발표하며 자사 경영의 패러다임을 친환경으로 전환한다고 천명했다. 혁신기술을 통해 기후위기 극복에 기여하고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추진한다는 게 골자다. RE100 가입을 비롯한 탄소 직간접 배출 감축, 초절전 제품 개발 등 구체적인 방법론도 제시했다. 

(왼쪽부터)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연합뉴스·사진공동취재단·뉴스1·시사저널 박정훈

삼성전자 발표 후 더 바빠진 재계 

신환경경영전략은 삼성전자가 13년 만에 새로 내놓은 환경경영 방침이다. 삼성전자는 1992년 ‘삼성환경선언’(환경문제가 선택이 아닌 필수 투자라는 인식 공유)을 발표한 뒤 2005년 ‘환경중시’(5대 경영 원칙 중 하나로 지정), 2009년 ‘녹색경영비전’(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친환경 제품 확대 추진)으로 친환경 전략을 구체화해 갔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게 복잡해진 대내외 경영환경 속에서 짠 새 전략은 업그레이드 수준이 아닌, 그룹의 명운을 건 환골탈태 방안이었다. 막대한 비용 부담도 수반되는 해당 조치를 결단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이는 총수인 이 부회장밖에 없다. 

이 부회장은 8월15일 광복절 특별 복권 이후 신환경경영전략 수립 마무리와 발표를 서두른 것으로 알려졌다. 친환경으로의 경영 패러다임 전환은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시급한 조치였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글로벌 고객사와 투자사로부터 RE100에 동참하라는 압박을 받아왔다. 특히 폭염, 가뭄 등 기후변화에 노출되면서 친환경 바람이 일고 있는 유럽·북미 시장의 요구가 거셌다. 

해외 의존도가 높은 삼성전자로선 생존을 위해 RE100 가입을 더는 미루기 어려웠다. 경쟁사인 애플, TSMC 등이 일찌감치 RE100에 가입한 사실도 이 부회장을 강하게 압박했다. 이 부회장이 RE100 가입을 결정하자마자 유럽 최대 연기금인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APG) 측은 크게 환영했다. 박유경 APG 아시아태평양 책임투자 총괄이사는 “지난 몇 년간 탄소 배출량을 유의미하게 줄여 나갈 방안에 대한 선언을 미뤄온 삼성전자의 태도는 APG와 같은 장기 투자자에게 상당한 우려를 안긴 바 있다”며 “이번 (RE100 가입) 선언은 삼성전자 경영진이 기후변화로 인해 변하고 있는 글로벌 경영환경에 응답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삼성전자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번 선언은 한국 경제가 성장해온 방식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견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은 건 총수들의 결단뿐” 

이 부회장의 용단 후에 주어진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삼성전자의 전력수요가 글로벌 IT 제조사 중 최대 규모이니만큼 재생에너지 수급이 쉽지 않고, 국내 재생에너지 공급 여건도 불안해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대표이사는 “기업들이 저마다 친환경 전략을 구상하거나 실행해 왔지만, RE100 가입 선언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오픈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돈(지출)과 직결되기 때문”이라며 “삼성전자는 라이벌들이 먼저 RE100에 가입하며 치고 나가니 당장 움직여야만 했다”고 분석했다. 다만 그는 “업종을 막론하고 RE100에 가입하는 글로벌 리딩 기업이 갈수록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를 포함한 많은 국내 기업도 동참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남은 건 총수의 결단뿐”이라면서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전자가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솔선수범했으니, 아무래도 다른 기업들의 관련 행보가 빨라지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9월22일 현재까지 RE100에 가입한 381개사 가운데 국내 기업은 23곳이다. 삼성전자와 SK그룹 계열사 7곳(㈜SK, SK하이닉스, SK텔레콤, SK머티리얼즈, SK실트론, SKC, SK아이이테크놀로지),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 4곳(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LG그룹 계열사 2곳(LG에너지솔루션, LG이노텍), 롯데칠성음료 등 5대 그룹 계열사가 전체의 70%가량을 차지한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을 강조해온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20년 11월 그룹 계열사 6곳을 국내 최초로 RE100에 가입시켰다. 이듬해 9월 한 곳을 추가했다. 화석연료 관련 사업을 해 가입 대상에서 제외된 SK E&S, SK에너지, SK가스 등 계열사는 자체적으로 RE100에 준하는 목표를 세우고 재생에너지 사용을 확대하게 했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의 경우 회사 단위 가입 조건에 따라 가입하지 못했으나, RE100과 동일한 수준의 목표를 세워 실행할 계획이다. RE100 주관 단체인 더클라이밋그룹 측은 “SK그룹이 RE100 가입을 선도하며 ‘재생에너지가 국가의 미래’라는 강력한 신호를 한국 시장에 보냈다”고 평가했다. 

최 회장은 RE100 가입 이전부터 친환경 사업·활동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SK E&S는 2020년 9월 새만금 간척지에 여의도 크기(264만㎡·80만 평)의 태양광발전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자로 선정됐고, SK텔레콤은 빌딩에너지 관리시스템(BEMS) 등을 활용해 소모 전력을 절감했다. SK건설은 경기 화성과 파주에 수소연료전지 발전소를 준공해 가동 중이다.

국내 RE100 가입사, 5대 그룹이 70% 차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RE100 동참을 넘어 친환경 경영의 보폭을 넓히고 있다. 정 회장은 올 상반기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의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하면서 16조2000억원을 쏟아부어 순수 전기차, 수소 전기차,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 친환경 사업을 고도화하겠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다른 주요 계열사들에 대해서도 사업장 내에서 재생에너지 전력 사용을 확대하는 등 친환경 전략을 따르게 할 계획이다. 

올해 취임 4주년을 맞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미래 성장동력으로 친환경 클린테크(Clean Tech)를 낙점했다. 클린테크는 기업의 친환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술을 의미한다. 구 회장은 앞으로 5년간 국내외에서 클린테크 분야에 2조원 이상을 투자해 집중 육성키로 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롯데칠성음료에 더해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을 RE100에 가입시키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미 롯데케미칼은 에너지 효율 개선과 탄소 포집 기술 적용 확대, 수소·신재생에너지 도입 등을 통해 2030년 탄소 배출량을 2019년 대비 25% 저감하고, 2050년에는 탄소중립을 달성한다는 비전을 지난 5월 공개했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기업 자체의 ESG 경영 전략에 고객사 요구,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세 도입(탄소 배출이 많은 품목에 추가로 세금을 매기는 것) 예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탄소 배출 공시 의무화 추진 등까지 더해진 환경에서 국내 기업들의 RE100 가입 러시가 가속화하고 있다”며 “RE100 달성이 안 되면 국내 기업들의 해외 수출 판로는 점점 막히게 된다. 기업들의 RE100 요건 충족을 돕기 위해 풍력과 태양광 설치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 대기업 10곳 중 3곳 “글로벌 고객사가 재생에너지 사용 요구” 

이제 기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재생에너지 사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분위기다. 최근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 제조 분야 대기업 10곳 중 3곳이 글로벌 고객사로부터 ‘제품 생산 과정에서 재생에너지를 사용해 달라’고 직간접적으로 요구받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제조기업 300곳(대기업 80곳, 중견기업 220곳)을 대상으로 RE100 관련 실태를 조사한 결과, 글로벌 고객사로부터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받았다고 답한 기업은 14.7%였다. 기업 규모별로 살펴보면 대기업이 28.8%, 중견기업은 9.5% 수준이었다.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받은 시점은 ‘2030년 이후’가 38.1%로 가장 많았고, ‘2025년까지’(33.3%), ‘2026〜30년’(9.5%)이 뒤를 이었다. 

조사 대상 기업들은 RE100 참여와 관련해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비용 부담’(35.0%)을 꼽았다. 이어 ‘관련 제도 및 인프라 미흡’(23.7%), ‘정보 부족’(23.1%), ‘전문인력 부족’(17.4%) 순으로 응답했다. 기업들이 비용 부담을 호소하는 것은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량 부족 때문이라고 대한상의는 지적했다. 지난해 국내 전력사용량 상위 5개 기업은 한국전력으로부터 총 47.7TWh(테라와트시) 규모의 전력을 구매했는데, 같은 기간 국내 전체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43.1TWh에 머물렀다. 

기업들이 RE100 참여를 위해 정부에 희망하는 정책 과제로는 ‘경제적 인센티브 확대’(25.1%)가 가장 많았고, ‘재생에너지 구매의 온실가스 감축 실적 인정’(23.2%), ‘재생에너지 전력 인프라 확대’(19.8%), ‘정보 및 재생에너지 사업자 매칭 컨설팅 지원’(16.5%) 등이 거론됐다. 

대한상의는 인센티브 확대를 비롯해 전력거래계약(PPA) 부가비용 최소화, 녹색요금제 추가비용 면제 등 국내 기업들의 RE100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정책 과제들을 정부에 건의했다. 김녹영 대한상의 탄소중립센터장은 “해외 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 요구 수준이 높아지면서 국내 기업의 중견·중소기업 협력사에까지 재생에너지 사용 요구가 이어질 수 있다”며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중견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 증가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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