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은 로맨스가 아니다 [남인숙의 귀여겨듣기]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03 08:05
  • 호수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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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명분으로 집착하는 행위를 로맨스의 연장으로 보는 끔찍한 상식 파괴해야

9월24일 김상범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 분향소를 찾아 피해자와 유족에게 공식 사과했다. 해당 사건은 가해자가 3년이나 직장 동기인 여성을 집요하게 스토킹한 끝에 잔인하게 살해한 일이다. 피해자는 구제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직장 내에서 제대로 된 분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가해자가 회사 시스템을 이용해 피해자의 신상과 실시간 위치까지 알아낼 정도로 공사 측 관리가 허술했다. 그런데도 사건 후 열흘이나 지나 겨우 사과한 것이다. 필자가 가장 안타까웠던 지점은 피해자가 생전에 당했던 2차 가해에 대한 증언이었다.

“직원들이 (피해자가) 우리 언니인 줄 모르고, ‘그 사람(가해자)은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누가 신고했을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성폭력과 스토킹에 시달리고도 도리어 가해자로 몰리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여전히 ‘스토킹 행위와 범죄를 구분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처벌에 집중할 경우 인권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반대 의견을 내고 있고, 아마 이번 사건이 실질적인 입법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듯하다. 스토킹 행위를 로맨스의 연장으로 보는 이 끔찍한 상식은 대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을까.

여성노동연대회의가 9월22일 서울 종로구 종각 앞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해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여성노동연대회의가 9월22일 서울 종로구 종각 앞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해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대에게 강요하는 욕망을 뱀으로 형상화

한국의 민담에는 유독 ‘상사병’에 대한 것이 많다. 짝사랑이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이야기의 좋은 재료가 되지만, 한국의 상사병은 대체로 신분 차이가 장벽으로 작용한 실연이 자기 파괴로 이어진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연정이다.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그런 장벽만 없다면 마음을 받아주는 게 인지상정일 거라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반면 서구권 신화나 민담에서는 극단적인 짝사랑이 다르게 묘사되는 경우가 흔하다. 대표적인 것이 키르케와 글라우코스, 스킬라의 이야기인데, 여기에는 오직 짝사랑만이 존재하는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바다의 신인 글라우코스는 님프(요정)인 스킬라를 짝사랑해 그의 마음을 돌릴 미약을 또 다른 님프 키르케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글라우코스를 짝사랑하던 키르케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미약 대신 독초를 내어준다. 결국 죄 없는 스킬라는 그 독 때문에 괴물로 변하고, 일부 전승에서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야기를 접하는 이들은 상대의 감정을 무시한 짝사랑은 공감받지 못할 폭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짝사랑에 관대한 우리 민담에도 한 가지 예외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사뱀’이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죽어 뱀으로 변한 것으로, 연정 상대의 몸을 휘감은 채 떨어지지 않는다(우연찮게도 ‘스토킹’의 정의와 놀랍게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상사뱀 이야기 중 대표적인 것이 춘천 청평사에 있는 공주탑에 얽힌 민담이다.

원나라 순제의 딸은 미모가 출중했다. 어느 하급 관리가 공주의 모습을 보고 반해 상사병에 걸려 앓다 죽었다. 그는 죽어서라도 공주와 함께하겠다는 마지막 말대로 뱀이 되어 공주 몸에 휘감아 붙었는데, 무슨 수를 써도 그 뱀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공주는 이후 십 년이나 뱀에 사로잡힌 몸으로 고통받으며 살게 되었다. 절망한 채 유랑을 하게 된 공주는 흘러흘러 고려 땅 청평사에까지 오게 되었다. 여기서 공주는 우연히 신비한 가사(袈裟)를 지어 입게 된다. 그 가사의 법력으로 뱀이 타 죽어 드디어 공주는 해방된다. 이 일로 순제가 그 공을 치하해 탑을 세워주었다는 미담으로 전설은 마무리된다. 순정을 비교적 편애했던 조상들조차 상대에게 강요하는 욕망을 가장 혐오스러운 이미지인 뱀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로맨스고, 어디까지가 뱀과 같은 이기성일까.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강원도 춘천시 청평사 계곡에 있는 상사뱀 조형물 ⓒ한국일보 뉴스뱅크이미지

상사병 걸리고, 극복 못 한다면 그건 질병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욕망을 품는다는 것은 분명 쓸쓸한 일이다. 여기까지는 로맨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상사병에 걸리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건 질병이다. 현대의학에서는 상사병을 강박증이나 불안장애로 본다. 실제로 원래 강박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 주로 상사병에 걸린다는 보고가 있고, 약물치료가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끝내 상사뱀처럼 상대를 옥죄게 되면 그건 스토킹이다. 그리고 스토킹은 범죄다.

우리 유교 문화에서는 애정 문제에서 ‘절개’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강조되곤 했다. 감정 자체보다도 일관된 태도를 지속하는 걸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일방적인 사랑에 대해 관대한 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적인 남성다움의 전형성이 ‘밀어붙이기식 사랑’을 환영하는 면도 한몫한다. 그러나 이런 특성들은 남성에게 연애와 결혼이 어려워진 시대로 접어들면서 굴절되어 나타나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결혼은 필수였기에 일방적인 애정 공세로도 웬만큼 일대일 매칭이 가능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성비 불균형이 심화하고 젊은 여성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거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과거에 당연한 수순이었던 연애, 결혼, 가정 형성 등이 어려워진 인구가 현저히 늘어난 것이다. 이전 세대에게서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이성에게 반복적으로 거부당하는 경험을 한 이들의 좌절은 강박과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스토킹 끝에 ‘안 만나준다’는 동기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이런 사건이 더 빈번해지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스토킹 범죄 건수는 5년 전에 비해 8배나 증가했다.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 이후 법무부에서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했고, 대법원도 조건부 석방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는 등 처벌 수위를 높여 대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좋아해 주는데 마음 좀 받아주지’와 같은 정서가 남아있는 한, 실질적이고 진지한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우리 식 글로벌 스탠더드인 미국에서는 스토킹만으로도 전자발찌를 차고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다. 우리도 이제 곁에서 보기에 안쓰러운 로맨스에서 스토킹이라는 범죄를 떼어내 분리할 때가 되었다.

남인숙 작가
남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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