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이 병합하려는 우크라 동·남부 4개 주는 과연 ‘친러’일까 [오은경 기고]
  •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29 14:00
  • 호수 17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답이 정해진 돈바스인들의 강요된 투표, 러시아에 대한 향수로 오도될 수 없어…본질은 경제적 이해관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 동부와 남부 4곳에서 대대적인 주민투표를 강행했다. 목적은 러시아로의 공식 합병을 위한 것이다. 돈바스 지역으로 불리는 도네츠크,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은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이 세웠고, 남부 헤르손과 자포리자는 러시아가 이번 전쟁을 통해 점령한 곳이다. 9월27일(현지시각) ‘압도적 찬성율’로 가결됐다고 밝힌 이번 주민투표로 푸틴 대통령이 4개 주의 공식 합병을 정당화할 경우,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이 지역을 탈환하고자 벌이는 전쟁을 ‘침공’이라고 우길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러시아 내에 강제동원과 징집령을 내리면서까지 확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푸틴이 수세에 몰린 위기를 벗어나고자 전술핵을 사용할 태세에 들어섰다는 불안감 때문에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 그 자체다. 총으로 생명을 위협하면서 ‘정답’이 정해져 있는 투표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야말로 강요된 ‘찬성’을 기초해서라도 정당성을 얻어 보겠다는 푸틴의 발상은 전체주의의 폭압과 다름없다고 유럽은 반발하고 있다.  

9월2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의 실외 투표소에서 주민들이 러시아 귀속 여부를 묻는 투표에 참가하기 위해 줄지어 있다. ⓒEPA·연합뉴스
9월2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의 실외 투표소에서 주민들이 러시아 귀속 여부를 묻는 투표에 참가하기 위해 줄지어 있다. ⓒEPA·연합뉴스

‘석탄산업 몰락’ 패배감으로 분리주의 태동

현재 푸틴이 러시아로 강제 병합하고자 하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지역 4개 주는 러시아 남부로 이어지는 드니프로강에서부터 볼가강 유역까지 펼쳐지는 초원지대다. 역사적으로는 주로 유목민 코자크인들의 무대였다. 이 지역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721년 도네츠강 유역에서 석탄층이 발견되면서부터다. 1827년에는 한 지질학자가 ‘도네츠키 부힐니 바이세인(도네츠 석탄 분지)’이라고 명명하면서 ‘돈바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제정러시아 시대에는 이 석탄 때문에 ‘산업혁명’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856년 크림전쟁에서 패하자 이를 복구하기 위해 산업을 육성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알렉산드르 2세는 석탄과 철강 산업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대대적인 지원을 쏟아냈다. 보호관세까지 더해지자 외국자본도 몰려들었다. 1861년 농노 해방으로 노동력 확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철도 확장은 이 지역 발전을 더 가속화했다. 1904년 돈바스의 석탄과 크리비-리흐의 철을 연결해주는 예카테리나 철도(드니프로 철도)가 완공되자 이 지역은 대규모 중공업 산업단지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이 지역에 정체성 혼란과 정치적 분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제정러시아가 붕괴한 이후다.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민족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 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섞여 사는 돈바스 지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곤란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문제가 정리되지 못한 채 혼란은 가중되었다. 민족 문제와 더불어 이념과 노선 차이가 정치적 갈등을 다각화했다. 여기에 노동자와 농민 세력 간 갈등이 더해졌다. 노동자들은 ‘볼셰비키’로, 농민들은 ‘마흐노 운동’으로 결집되었다. 

돈바스 지역이 우크라이나 영토로 공식화된 것은 1922년 우크라이나소비에트공화국에 귀속되면서부터다. 레닌이 이런 역사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프티 부르주아 농민공화국 탄생에 대한 우려와 불안 때문이었다. 그는 농업 중심인 우크라이나를 노동자 중심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혁명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했다. 

석탄과 돈바스의 가치를 절감하고 있던 레닌은 죽었지만, 스탈린이 집권하자 돈바스의 가치는 급부상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석탄이야말로 절실했고, 돈바스 지역은 급속하게 소비에트화되었다. 이 지역 경제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했다. 1928년부터는 산업화와 집단화를 기반으로 5개년 계획경제가 도입되었고, 돈바스와 드니프로 일대 공업지대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른바 ‘스탈린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돈바스는 그 중심이었다.

1960~70년대 정점을 찍었던 돈바스의 ‘황금시대’는 이후 조금씩 퇴색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시베리아에서 석탄·유전·가스 매장지가 대대적으로 발견되었고, 석탄화력발전에 이어 원자력발전이 등장하는 등 전기 생산이 다각화되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 집중되었던 산업 투자 또한 균형 발전을 위해 우랄 동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80년대다. 무엇보다 이미 석탄 경제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석유와 가스가 주요 에너지원으로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산업구조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 경제 또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개혁·개방 정책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침몰해 갔다. 돈바스 석탄산업은 이미 경쟁력을 잃은 채 보조금에 의존해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불만을 가진 광산노동자들은 1990년대를 거의 파업으로 보냈다. 상실감과 불만으로 채워진 돈바스 주민들의 패배감은 결국 분리주의 태동과 분리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푸틴의 야욕 속에 묻혀버린 지역 문제의 본질

하지만 분리주의자들의 등장이 곧 지역 주민 대다수가 분리주의자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도 역사적 맥락이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기업에 파견되어 관리자 역할을 했던 이른바 ‘적색 관리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다. 바로 ‘클랜’의 등장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가던 돈바스 지역에는 ‘도네츠키예’가 탄생하는데, 중앙정치를 장악한 ‘도네츠크 클랜’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돈바스 지역 주민들은 ‘돈바스가 우크라이나를 먹여 살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공감대에 힘입어 도네츠크 클랜은 돈바스 경제를 장악하고, 그들과 연결된 지역당이 돈바스 지역 정치를 장악하는 구조를 완성할 수 있었다. 급기야 2010년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본격적인 도네츠크 클랜의 시대가 열렸다. 제1부총리, 세금세입 장관, 내무장관, 에너지 장관 등 요직에 클랜 출신이 대거 등용됐다. 우크라이나 현대사에서 발생한 ‘친러 대 반러’ ‘민주 대 반민주’로 포장된 국내 갈등은 본질적으로는 클랜에서 성장한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 간 권력 싸움이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몰락으로 도네츠크 클랜 또한 세력을 잃게 되자 분리주의자의 활동이 힘을 얻게 된다. 이들은 러시아의 후원으로 조직된 소수 권력이었다. 그러므로 폭력적 분리주의와 내전이 지역 주민 다수의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엄밀하게 볼 때 돈바스 지역 주민들의 불만은 러시아에 대한 향수에 기인한다기보다는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돈바스 지역 주민들의 정서와 불만의 본질은 푸틴의 정치적 야욕과 전략 속에 민족 갈등과 영토분쟁으로 포장되었다. 갈등의 역사적 배경과 본질을 무시한 채 이 지역 주민들이 던진 강요된 찬성표가 억지 정당성을 만들어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전술핵 사용의 구실로 이용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 특정 지역의 아픔을 이렇듯 제멋대로 악용하고, 인류와 휴머니즘을 위협해도 되는 것일까. 역사는 푸틴의 망동이 어디까지 치달을까 목도하고 있다. 전체주의의 끝을 보여주었던 역사는 또다시 반복될 것인가.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