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소형 미니어처에 공존하는 안정과 불안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02 16:05
  • 호수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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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트 코드’로 조각의 세대교체 이뤄낸 함진
개인전 《엄마》 통해 내면의 불안 표출 왜?

“묘지 같다.” 함진 개인전 《엄마》(9월23일~11월12일, 페리지갤러리)의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서 받은 첫인상은 이랬다. 하얀 육면체 공간 안에 빼곡히 세운 하얀 좌대의 나열이 줄지어 선 묘비처럼 보였던가 보다. 길고 가느다란 좌대 위로 손가락 길이보다 짧거나 때론 손톱 크기만도 못한 초소형 조각이 놓였다. 크기가 워낙 작다 보니 거리를 둔 감상법이 아니라 세부를 감식하는 수준의 관람이 요구된다. 초소형 조각을 세밀히 보도록 돋보기가 전시장에 비치돼 있기도 하다.

예술 감동은 상반되는 성격이 공존할 때 흡인력이 높아진다. 큰 규모나 육중한 재료와 직결되는 조각 장르를 미니 사이즈에 가벼운 재료로 완성하는 함진의 조각에는 기대감을 뒤집는 반전이 있다. 보존성 때문에 돌과 금속 같은 무거운 재료를 썼던 조각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지만 미술계 주류의 일각에선 재료 혁명이 일어난 지 오래다. 올여름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조각 충동》은 새로운 조각 세대의 등장을 정리한 기획 전시로 작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전시에 초대된 작품은 우레탄폼, 종이, 스펀지 등을 조각의 재료로 썼다.

ⓒ함진 제공
함진 개인전 《엄마》의 작품을 한 관객이 돋보기로 감상하고 있다.ⓒ이민재 제공

기대감 뒤집는 반전을 보여주는 예술가

지금 같은 조각의 세대교체에 상징적인 시발점 중 하나로 20여 년 전 출현한 함진의 초소형 조각을 들 수 있다. 함진(1978년생)이 20대 초반이던 1999년은 후일 한국 미술계 지각 변화의 견인차가 된 ‘대안공간’이 처음 출현한 때다. 그해 출범한 1세대 대안공간 가운데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의 개관전 초대작가로 함진이 선정됐다. 그 후로 함진 앞엔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했다. 2004년 굴지의 상업 갤러리 전속 작가가 됐고,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의 경우, 비록 전에 없이 15명을 선정해 무리수였다는 지적이 있었지만(국가관에는 1명 혹은 2명이 선정됨), 한국관 선정 작가 목록에 함진이 포함될 만큼 당시 그의 스타성은 부인할 수 없었다.

“오늘 제 작품 되게 많이 팔렸어요.” 2004년 전속 갤러리 개인전 오프닝 날 전시장 초입에서 만난 함진이 상기된 어투로 한 말은 이랬다. 전시장 벽과 바닥 사이의 틈새에 초소형 인형들을 채운 작품 설치 방식 하며, 그걸 보기 위해 관객이 몸을 웅크려서 돋보기로 관람하게 만든 방식도 파격적이었다. 일회용 사발면 용기 위에 인형들을 가지런히 앉히거나, 인형과 파리(벌레)를 서로 부둥켜안게 연출한 작품도 동시대 ‘큐트’ 감성을 미술에 도입한 그만의 순발력이었다. 당시 출품작은 개인전 제목인 《애완(愛玩)》 자체였다. 이후 보존이 곤란한 나풀거리는 털실처럼 불안한 검은색 작업으로의 변화가 있었다. 그의 전성기 작업이 대중적 코드와 통했다면, 검은색 작업 이후는 쉽게 설명되기 힘든 그의 심연을 표현한 것 같았다.

거두절미하고 함진의 삶과 그의 작품은 그 후로 곡절이 따랐다. 창작은 이어졌으나 2020년 개인전 《Head》에선 손톱 크기의 소형 작업으로 각인된 함진 브랜드에 견주어, 30cm가 넘는 큰 사이즈를 내놨고 지난 시절 ‘큐트’ 감성과 대비되는 괴이한 형상을 출품했다. 화상으로 흘러내린 피부처럼 살과 뼈가 뒤엉킨 험악한 두상 작업이었는데, 내면의 불안을 표현한 것 같기도 했다.

이즈음 함진은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축된 모습이었다. 한 인물 혹은 한 작품으로부터 지나간 시절을 환기하거나 현재의 미술계 혹은 자신이 몰두하는 관심사를 판단하는 단서를 찾기도 한다. 나와 같은 시기에 미술판에 발을 들인 함진과 그의 작품이 내겐 그런 단서가 된다. 예술 감상의 보편적인 감동이 아닌, 개인만이 발견하는 진면모란 이런 게 아닐까 한다. 요 몇 년 사이 미술시장 과열로 부상한 여러 신예를 보며 명성의 무상함을 내가 떠올리는 것도 그런 개인적 단서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열린 해석과 닫힌 해석으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다. 난해한 예술에 움츠러든 일반인을 격려하려는지 ‘보는 이의 작품 해석은 항상 옳다’며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열린 해석론이 있다. 그럼에도 닫힌 해석에 적합한 예술은 얼마든지 있다. 비를 맞는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보고 ‘불안한 시국에 선조 장군께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누군가 멋대로 풀이한들 공감 가는 해석이 되진 못한다. 이순신 동상은 ‘조선 중기 무신의 용맹과 애국심을 후대에 기념함’ 그 이상, 이하로 해석되긴 어려운 닫힌 작품이다.

부피가 작은 함진의 조각 세계에선 작품과 제목이 1대1로 대응되지 않는다. 이번 개인전 출품작 제목에 쓰인 ‘엄마’ ‘인간’ ‘서있는 사람’은 제목에 상응하는 형상이 정확히 어울렸다기보다 어렴풋이 제목에 근사한 사물이 놓여 있다. 선명하지 않은 여백은 보는 이의 몫으로 남는다. 이때 해석의 창이 열리는 것이다. 근자에 나의 관심은 죽음, 무상함, 허망함 등에 꽂혀 있다. 50대 이전에는 떠올릴 수 없던 화두가 관심 영역으로 들어왔다. 함진 전시장의 첫 대면에서 묘지를 떠올린 게, 최근 관심사의 프레임이 유도한 착시일 수도 있겠다.

인형의 사타구니에 가느다란 철봉을 꽂은 《서있는 사람 01》이란 작품은 아마 좌대에 세울 방편에서 저런 모양새가 된 걸 테지만, 흡사 중세 전후로 죄인이나 포획한 적의 사타구니에 창을 꽂아 거리에 세워뒀던 야만적인 처형 광경을 떠올리게 했고, 그로 인해 나는 죽음을 한 번 더 환기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한 이 같은 해석은 열린 작품에서는 자유다.

ⓒ함진 제공
함진 《서있는 사람 01》(왼쪽),  함진 《서있는 사람 02》ⓒ함진 제공
ⓒ함진 제공
함진 《나》ⓒ함진 제공

기괴하되 크기가 작아 위협감 없는 조각들

함진의 이번 개인전에서 한창 때인 2000년대를 떠올린 건, 미술인에겐 친숙한 작은 인형 조각 때문일 게다. 그런데 대중 선호도가 높은 과거의 귀여움 코드와 결별하고 소수만이 통할 수 있는 내면의 불안이 스민 열린 해석으로 돌아왔다.

상반되는 성격의 공존이 예술 감동을 배가한다는 경험칙을 소환해 본다. 딱 잘라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형상에 ‘엄마’ ‘올빼미’ ‘인간’처럼 평범한 제목이 붙어있다. 기괴하되 크기가 작아 위협감 없는 조각들은 보는 이에게 열린 해석의 창이 돼주는데, 나는 죽음, 무상함, 허망함을 읽었다는 얘기다. 작품 중에는 자신을 하나도 귀엽지 않게 표현한 《나》가 있다. 높이 6.3cm의 초소형 자소상인 이 작품의 크기는 깜찍해도 내면의 불안이 배어있다. 그건 기고만장했던 전성기를 지나, 절망으로 일그러진 수난기를 지나 도착한 지점 같다. 안정과 불안의 공존은 함진에게도, 내게도 깨어있는 모두에게도 최적의 순간이라 믿는다. 이로써 열린 해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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