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말이 부끄러워질 때 나라도 부끄러워진다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10 08:35
  • 호수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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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방송 중인 한 소화제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든지 소화해내고야 만다. 그것도 시원하게.” 그만큼 다양하게 많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화 활동에 자사 제품도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 내놓은 광고일 것이다.

음식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말 속에서조차 많은 것을 ‘먹는다’. 나이를 먹고, 더위를 먹고, 겁을 먹고, 친구도 먹는다. 게다가 ATM은 카드를 먹고, 몸은 바지를 먹으며, 프린터는 종이를 먹는다. 한 복싱 선수는 세계대회 금메달을 딴 후 감격한 목소리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말해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말 속에서 많은 것을 먹지만, 소화까지 완전하게 해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말이 온전하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언어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많은 말이 엉뚱하게 쓰이거나 비문(非文)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에는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두고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왜 밋밋하게 하나”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매우 깊다’라는 뜻의 ‘심심(甚深)’이라는 한자어를 순우리말인 ‘심심’으로 오해해 받아들이면서 일어난 촌극이다. 또 어떤 방송 기자는 ‘무운(武運)을 빈다’라는 한 정치인의 발언을 ‘운이 없기(無運)를 빈다’라는 뜻으로 해석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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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뜻을 잘못 이해한 사례 외에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잘못 사용해선 안 되는 표현도 자주 눈에 띈다. 이를 테면 ‘다르다’와 ‘틀리다’처럼 용례에 어긋나거나 뜻이 맞지 않는 말이 여전히 많이 쓰인다는 얘기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엄연히 다른 의미의 단어이므로 상황에 맞춰 올바르게 사용하자고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데도 크게 나아지는 기미가 없다. 다른 것이 틀린 것으로 규정되면 차별이 정당화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등의 우려는 계속 울림 없는 메아리 꼴이 되고 있다.

언어 속 차별의 문제도 심각하다. 최근 EBS에서 방영한 《당신의 문해력+》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와 관련한 언어 감수성 테스트를 공개적으로 실시한 적이 있다. 이 테스트에 등장하는 표현 가운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꽤 많다, 차별의 의미가 담긴 ‘민낯’이나 ‘농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 테스트를 진행하면서 ‘민낯’을 기사 제목에 별다른 고민 없이 써온 과거의 행적이 스스로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본토에서 잘못된 표현들로 인해 여러 수모를 당하기도 하지만, 우리말과 우리글은 여전히 자랑스러운 우리 모두의 자산이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세계 많은 나라로 퍼져 나가면서 K-팝, K-드라마·무비 못지않게 K-말·글의 위상 또한 날로 높아가는 추세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다. 그 탓에 욕설과 비속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문제의 발언을 한 대통령 스스로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에 따라 국민들 또한 본의 아니게 대통령의 기억 속에 갇힌 형국이 되어버렸다. 진위야 어찌 됐든 욕설은 듣는 사람을 욕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말 자체를 욕되게 하는 언어적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언어의 수준이 곧 사회의 수준이라는 말도 있는 만큼, 우리말과 우리글의 품격을 제대로 지키려면 결국 어른들이 잘해야 한다, 576돌째인 한글날을 맞아 돌아본 ‘한글’이 지금 이렇게 많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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