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로 한국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반추하다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22 16:05
  • 호수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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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안부가 필요한 세상, 뮤지컬 《어차피 혼자》 통해 삶을 위로받아

2005년 초연돼 지금도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빨래》는 한국 창작뮤지컬의 대표 작품 중 하나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시대를 앞서간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빨래》는 서울살이 5년 차인 직장인 나영과 몽골 출신 외국인 노동자 솔롱고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팍팍한 현실이지만 희망이 새겨진 일상을 나누는 서민 이웃들의 이야기다.

《빨래》를 창작한 추민주 작가 겸 연출가와 민찬홍 작곡가가 작품을 처음 구상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사회문제였던 외국인 노동자 차별, 직장 내 갑질과 부당해고, 서울의 높은 물가로 인한 도시 빈민화 등은 지난 20여 년 동안 다소 개선됐다고는 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이 주류인 뮤지컬계에서 이러한 한국 사회문제를 소재로 담은 작품을 창작하는 시도 자체도 용감했지만, 작품의 완성도 역시 높다. 관객들은 《빨래》를 통해 우리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뮤지컬 《어차피 혼자》 무대 장면ⓒPL엔터테인먼트 제공
뮤지컬 《어차피 혼자》 배우들ⓒPL엔터테인먼트 제공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직장 내 갑질과 도시 빈민화 다뤄

두 창작자는 2013년 비슷한 결을 가진 또 다른 신작을 창작한다. 《어차피 혼자》라는 작품으로 혼자 사는 노인들의 고독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워크숍으로만 짧게 공연돼 관객들에게는 정식 공연으로 소개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올해 드디어 본공연이 만들어졌다.

《빨래》에는 주인공 나영이 힘들 때 빨래를 함께 하며 위로를 나누는 주인집 할매와 옆방의 희정엄마가 등장한다. 피붙이는 아니지만 힘들 때 가족보다 끈끈한 안부를 나누며 정서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이러한 사람 냄새 나는 이웃들의 믿음과 위로의 공동체는 이번 작품에서도 바탕이 되고 있다. 《어차피 혼자》는 노후주택 재개발 이슈가 있는 어느 도시의 남구청 복지과를 배경으로 한다. 복지과에서 무연고 사망자를 처리하는 중년 여성 독고정순 주임(조정은, 윤공주)과 낙하산 신입으로 들어온 젊은 남자 서산(양희준, 황건하)이 주인공이다. 무연고 사망자들은 대부분 독거노인이다. 사후에 시신이 발견돼 담당 공무원이 그 뒤처리까지 해야 하는 그야말로 ‘혼자 사는 인생’의 불행한 결말이다. 《빨래》의 주제였던 ‘소외계층 차별의 벽을 넘은 위로’와도 맥이 닿는 독거노인들은 누군가의 부모였고 사회의 일꾼이었고 동네의 이웃이었다는 점에서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소재다.

이 작품의 소재인 고독사(孤獨死)란 가족, 친지, 친구들로부터 고립돼 혼자 사는 사람이 돌발적인 사고, 질병 혹은 자살 등의 이유로 사망하고 시신이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불행한 죽음을 의미한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노인 중 독거노인 비율은 2000년 16.0%에서 2022년 19.5%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평소 가족을 포함한 지인들의 왕래가 전혀 없이 고독사를 맞는 독거노인은 무연고자로 분류된다. 《어차피 혼자》에서 담당 주임인 독고정순은 이런 사례를 안타깝게 여겼다. 어떻게든 연고자를 찾고, 사망진단서에 기록된 사인을 통해 망자의 인생을 유추해 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독고정순은 2013년 개봉한 영화 《스틸 라이프》의 주인공인 런던 구청 소속 22년 차 공무원 존 메인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그 역시 고독사 담당자로 잊힌 망자의 유품을 단서로 그를 위해 추도문을 작성하고 장례식에 참석할 지인들을 수소문한다. 일면식도 없는 망자임에도 각각의 죽음에 예를 갖추고 삶의 가치가 있었음을 일깨운다. 하지만 한국인 독고정순에게는 좀 더 현실적인 사례가 등장한다. 바로 연락이 끊긴 가족들에게 사망 사실을 알려도 그들이 시신 수령을 거부하는 경우다. 생전에 가족 부양의 의무를 저버리고 가정폭력을 저지른 아버지는 시신이 되어서도 부인과 딸에게 환영받지 못하지만, 독고정순은 담당관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숨겨진 아픈 가족사를 떠올리며 그 역시 애도를 받을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고군분투한다.

독고정순과 대비되는 역할이자 상대역으로는 서산이라는 이름의 젊은 신입 직원이 등장한다. 서산은 휴머니즘을 갖추고는 있지만 부족한 자존감과 공허한 삶으로 인해 혼자만의 벽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2030세대를 상징한다. 그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반대에도 주변의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는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주변의 인간들에게는 마음을 열지 못한다. 아버지와 불화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노’라고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집값 폭등과 생활비의 수직 상승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서 감정적으로 충돌하는 요즘 2030세대의 안타까운 현실이 이 작품을 통해 반추되고 있다.

다행히 서산은 독고정순을 만나고 일을 배우면서 결국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공감대를 형성한다. 세대와 성별, 그리고 계급을 초월해 두 사람이 화합하는 모습은 누구나 타인을 통해 성장할 것은 남아있다는 교훈을 준다.

뮤지컬 《어차피 혼자》 포스터ⓒPL엔터테인먼트 제공

《어차피 혼자》가 던지는 근본적 질문은 ‘관심’

뮤지컬 오프닝 곡이자 타이틀 곡 《어차피 혼자》는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누구를 사랑하기도, 누가 날 사랑하기도 원치 않는 혼자 사는 인생.’ 사람은 누구나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 주변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치유된다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작품은 우리에게 그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해답은 관심에 있다. 이웃들과 오래 살았던 낡은 아파트에서 재개발로 보상금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기보다는 불편하지만 계속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정서가 요즘 같은 개발지상주의 시대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지라도 오며 가며 안부를 묻고 타인의 고독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결국 각자가 가진 걱정과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빨래》와 《어차피 혼자》에서 배경이 되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지역 소공동체는 어쩌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익명성에 익숙한 대도시에서는 이제 사라진 화석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외롭게 죽어간 독거노인의 긴 인생이 한두 줄의 보고서로만 남기보다는 누구나 기억될 만한 가치 있는 삶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연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11월20일(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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