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거 중이던 총수들 경영 전면에 나서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5 07:35
  • 호수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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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LF·교촌·삼양식품 등 오너 경영체제 전환
전문가들 “주주 권익 보호가 향후 평가의 관건”

농심그룹은 일찍부터 후계 구도를 구축했다. 고(故) 신춘호 창업주의 장남 신동원 회장이 주력회사인 농심을, 차남인 신동윤 회장이 율촌화학을, 삼남인 신동익 부회장이 메가마트를 각각 맡아 독립경영을 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신 창업주가 타계하면서 2세들의 계열분리 움직임이 가팔라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인사가 신동익 부회장이다. 신 부회장은 현재 메가마트 지분 56.14%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이 회사를 통해 엔디에스, 호텔농심, 농심캐피탈 등을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1999년 이후 회사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부친의 방침을 따른 것이다. 23년간 유지되던 전문경영인 체제가 깨진 것은 지난 7월이었다. 메가마트 이사회가 신 부회장을 대표이사로 선임한 것이다. 재계에서는 신 부 회장과 장남인 신승렬씨가 최근 잇달아 농심 지분을 매각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상속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로, 농심그룹이 본격적인 계열분리 수순에 돌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왼쪽부터)
(왼쪽부터)권원강 교촌치킨 창업주,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연합뉴스·시사저널 자료 사진·뉴스뱅크이미지

복합 경영위기 맞아 책임경영 나선 총수들

치킨 업계 1위인 교촌에프앤비(이하 교촌치킨)의 변화도 눈에 띈다. 지난 몇 년간 회사를 이끌어왔던 소진세·조은기 공동대표가 최근 석연찮은 이유로 해임됐다. 두 사람은 교촌치킨의 제2 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매출 5000억원 시대를 열었다. 이후 해외 진출을 통해 매출을 5년 내에 2배 늘리겠다고 밝혔다. 2020년 11월에는 프랜차이즈 최초로 코스피에 상장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올해 이사회에서는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임기가 2년이나 남은 조 대표는 해임됐고, 권원강 창업주의 중학교 동창인 소 회장은 연임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권 창업주가 사내이사 및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됐다. 권 창업주는 2019년 3월 “투명하고 전문화된 경영 시스템이 필요하다”면서 경영에서 물러났다. 교촌치킨 사령탑은 황학수 당시 총괄사장을 거쳐 롯데 출신인 소진세 회장과 SK 출신인 조은기 대표에게 넘어갔다. 이후 3년여 만에 다시 오너 경영체제로 복귀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빠르면 연내에, 늦어도 내년 주총에 맞춰 권 창업주가 대표이사에 복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권 창업주 역시 “복합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회사가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창업주가 직접 나서 책임경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변에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밖에도 범LG가인 LF그룹 오너 3세 구본진 대표가 최근 LF네트웍스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2017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5년 만이다. 2011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해온 하이트진로의 경우 박문덕 회장의 장남인 박태영 부사장이 최근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오너 경영을 서두르고 있다.

이렇듯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주요 기업의 오너 일가들이 최근 잇달아 경영 전면에 복귀하고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에 힘이 실리던 그동안의 재계 분위기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실제로 기업 분석 연구소인 리더스인덱스가 올 초 국내 411개 기업의 대표이사 출신을 조사한 결과, 전문경영인이 84%나 됐다. 10년 전 74%에서 10%나 증가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 이종태 퍼시스그룹 회장 등 이른바 ‘회장’ 직함을 단 전문경영인도 여럿 탄생했다. 반대로 오너 일가는 2012년 147명(26%)에서 올해 90명(16%)으로 크게 감소했다. 전문경영인이 더 이상 오너의 리더십을 보완하는 역할이 아니라는 인식이 재계에 확산됐다. 이면에는 등기이사가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매년 연봉도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오너 일가에 부담이 됐다는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최근 한국 경제 상황이 만만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 전 세계적인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금리, 고환율, 고물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레고랜드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까지 발생했다. 국고채 수준의 대우를 받는 지자체의 지급보증 사업이 사실상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시장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거래 절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장에서 돈줄이 말라붙었다.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한 일부 기업은 부도설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런 위기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것은 강력한 오너십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2008년 삼성 특검 수사로 경영에서 물러났던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년 만에 경영에 복귀할 수 있었던 명분도 위기였다. 10년 안에 삼성이 망할 수 있다는 ‘위기론’을 들고 경영에 복귀했다”면서 “오너 경영체제는 전문경영인과 달리 속도감 있는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복합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오너 일가가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고 말했다.

 

논란 빚었던 오너 일가도 속속 경영 전면에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도 나온다. 과거 논란을 빚었던 오너 일가들이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경영에 잇달아 복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재승 전 대웅제약 회장이 대표적이다. 윤 전 회장은 2018년 직원들에게 폭언과 욕설을 한 게 공개되면서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대웅제약은 전문경영인 체제에 돌입했다. 하지만 최근 윤 전 회장이 CVO(최고비전책임자)라는 직책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대웅제약 측은 언론에 “미등기 임원으로 자문 역할만 할 것”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CVO를 회장직과 대표이사 복귀를 위한 정지작업 차원으로 보고 있다.

김정수 삼양식품 총괄사장의 경우 올해 정기 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김 부회장은 2018년 4월 횡령 혐의로 남편인 전인장 전 회장과 함께 검찰에 기소됐다. 계열사가 삼양식품에 납품한 포장박스 등을 페이퍼컴퍼니에 납품한 것처럼 꾸며 50여억원을 빼돌린 혐의였다. 재판에 넘겨진 김 부회장 부부는 2020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고 경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해 10월 김 부회장은 총괄사장으로 경영에 복귀했고, 1년여 만에 다시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2019년 ‘막말 영상’으로 물의를 빚고 경영에서 물러난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도 지난 7월 지주사와 핵심 계열사 임원에 복귀했다. 이른바 ‘물컵 갑질’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조현민 부사장은 최근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부사장에 오른 지 1년 만이어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전문경영인 체제는 어차피 쇼다”면서 “사회적 논란을 잠재우고 평판을 되돌리기 위해 잠시 경영을 내려놓는 경우가 많다”면서도 “주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책임 있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아쉽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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