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경영 위기에 시험대에 오른 한국식 오너 경영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5 10:05
  • 호수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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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 경제위기에 총수의 역할·책임론 급부상
전문경영인 압도하는 오너 체제의 ‘명과 암’은?

‘책임경영 강화.’ 삼성전자 이사회가 최근 이재용 회장 추대를 의결하며 밝힌 1호 사유다. 총수에게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 복합 경제위기를 돌파해 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한 결과, 현재 재계에서는 삼성전자처럼 오너의 리더십에 힘을 싣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전문경영인이 ‘월급쟁이 사장’ 역할을 넘어 그룹을 책임지고 이끄는 경향이 감지됐던 것도 잠시, 대위기를 맞아 모두가 다시 오너를 쳐다보는 모습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연합뉴스

“리스크 감당하며 결단 내릴 사람은 총수뿐” 

이 회장이 공식적으로 ‘삼성 회장’ 타이틀을 단 10월27일 삼성전자는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 업황 악화로 ‘어닝 쇼크’(실적 충격)를 기록한 올 3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글로벌 반도체 매출 1위를 최대 라이벌인 대만 TSMC에 내준 대목이 특히 뼈아팠다. 

반도체를 비롯한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향후 실적 전망도 불투명하다. 11월7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개최한 ‘2023년 경제·산업전망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내년 한국의 5대 주력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분석했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조선 등 수출과 고용 모두에서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말 그대로 주력산업들이다. 삼성(반도체, 조선), SK(반도체, 석유화학), 현대자동차(자동차, 철강), LG(석유화학), 롯데(석유화학) 등 5대 그룹이 모두 연관돼 있다. 전문가들은 조선산업을 제외하곤 어느 하나 마음 놓을 만한 분야가 없다고 진단했다. 반도체와 자동차, 철강은 혼조세를, 석유화학은 약세를 보일 것으로 관측됐다. 

정부가 꺼낼 수 있는 정책 카드도 마땅찮다. 권태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정부 지출을 늘리기엔 재정 건전성이 문제고, 금리를 낮출 여건 역시 안 된다”며 “불합리한 규제 혁파, 낙후된 노동시장 혁신 등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거론된 해법도 당장 실현되기 어려울뿐더러 기업 경영에서 하나의 변수에 불과하다. 오너의 경영 능력에 따라 개별 기업의 명운이 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경영연구원 간부는 “커지는 경영 불확실성에 업종과 지배구조를 막론하고 오너의 역할론이 대두되고 있다”면서 “그룹 싱크탱크인 경영연구원 입장에선 총수를 직접적으로 보필하는 업무가 다른 활동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총수도 수시로 경영연구원과 현업의 보고를 받으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내 경영 여건상 모든 리스크를 감당하고 결단을 내릴 만한 사람은 오너 외에 없다”고 덧붙였다. 

사건·사고 터지자 모두 오너만 바라봐 

올 하반기 들어서는 유독 대기업에 관한 사건·사고도 많이 터져 나왔다. 어김없이 오너의 책임이 부각됐다. 대전고용노동청은 지난 9월말 8명의 사상자를 낸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 화재와 관련해, 김형종 현대백화점 사장과 아울렛 방재·보안시설 하청업체 대표 등 3명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고 11월3일 밝혔다. 그러자 닷새 뒤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와 중대재해없는세상만들기대전운동본부가 “실질적인 경영 책임자인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이 입건 대상에서 제외된 건 재벌 총수 봐주기”라며 오너 정 회장을 처벌하라고 촉구했다. 

SPC 총수 허영인 회장은 계열사 공장 직원 사망 사고와 관련해 자신을 향한 비난이 커지자 10월21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허 회장은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 여러분의 엄중한 질책과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 총 1000억원을 투자해 그룹 전반의 안전경영 시스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했다. 

서비스 장애 사태로 전국적인 혼란을 초래한 카카오는 일단 10월19일 전문경영인인 남궁훈 각자대표를 사퇴시키며 사태 수습의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런데도 성난 여론은 결국 김범수 창업자(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의 책임을 따져 물었다. 더 나아가 김 창업자에게 ‘뒤에 숨지 말고 경영 전면에 나서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김 창업자는 10월24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카카오 경영에 복귀할 계획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아직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올 초까지만 해도 재계에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부각됐던 점을 떠올리면 최근의 경영 환경이 얼마나 엄중한지 가늠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미래에셋 최현만 수석부회장과 삼성전자 김기남 부회장이 각각 회장 자리에 오른 것을 필두로 한동안 전문경영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대기업에서 중견기업에 이르기까지 전문경영인이 단순히 오너의 리더십을 보완하는 역할을 넘어 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게 된, 일종의 경영 트렌드 변화로 읽혔다. 

그러나 대내외 상황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전문경영인의 역할은 적극적인 사업 추진이 아닌 안정적인 관리 업무에 머물렀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이어가다 오너 경영체제로 회귀하는 기업도 나타났다. 국내 치킨 프랜차이즈 업계 1위 교촌치킨을 운영하는 교촌에프앤비는 오는 12월초 전문경영인인 소진세 회장과 결별한다. 창업자 권원강 전 회장의 복귀에 따른 조치다. 

권 전 회장은 ‘롯데맨’ 출신의 소 회장을 2019년 4월 회장으로 선임하면서 교촌의 변화와 혁신을 위해 좀 더 투명하고 전문화된 경영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업계 최초로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넘긴 사례로 화제를 모았지만, 4년도 채 되지 않아 이를 번복했다. 

허영인 SPC 회장(왼쪽 사진)과 김범수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시사저널 최준필·연합뉴스

오너 체제가 꼭 ‘책임경영’ 담보할까 

농심 계열사인 메가마트도 지난 7월 전문경영인 체제를 접고 오너 경영체제를 다시 가져왔다. 고(故) 신춘호 농심 창업자의 3남인 신동익 부회장이 23년 만에 대표이사직에 복귀했다. 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는 공동창업자인 송치형 회장·김형년 부회장이 이끄는 오너 경영체제를 지난 2월 확립했다. 이석우 대표이사는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오너가 있는 10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전문경영인 체제인 현대중공업의 경우 조만간 정몽준 대주주의 장남 정기선 사장이 전문경영인인 권오갑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을 전망이다. 

이들 기업은 오너 경영체제로의 전환에 관해 하나같이 ‘책임경영’을 내세운다. 하지만 오너 경영이 꼭 책임경영을 담보하는지를 따지면 뒷맛이 썩 개운치 않다. 삼성전자도 이미 이 회장이 부회장 직함을 달고 8년 넘게 경영 전반을 이끌었지만, 전문경영인 체제보다 크게 우위에 섰다고 볼 만한 부분은 없었다. 더구나 이 회장 취임 직전 삼성전자 DS 부문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오너의 리더십과 결단력을 두고 조금씩 불만이 새어 나온 바 있다. 당시 한 삼성전자 고위 임원은 시사저널과 만나 “현장에서 중지를 모아 (위기 타개책 등) 의견을 수시로 제시하는데, VIP(총수)가 가타부타 결정을 해주지 않아 답답할 때가 적지 않다”며 “VIP의 의중을 좀체 알지 못해 VIP 최측근들의 동향을 파악하며 움직여야 하는, 다소 비효율적인 소통 구조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러다 결정이 빠른 대만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다’던 그의 걱정은 올 3분기 실적 발표에서 현실화됐다. 

소진세 교촌에프앤비 회장이 물러나는 배경을 놓고는 ‘가맹점 확장과 해외 진출, 신사업 추진 등에 너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어 사내 구성원들과 불화가 생겼다’는 설이 나돌았다. 이는 관점에 따라 전문경영인이 월급쟁이의 한계를 넘어 책임경영을 펼쳤다는 것으로도 평가될 수 있다. 실제로 교촌에프앤비의 개별 기준 지난해 매출은 4935억원으로 사상 최대였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푸르밀 본사의 간판ⓒ연합뉴스

유제품 기업 푸르밀의 오너 일가는 얼마 전 일방적으로 사업 종료와 직원 해고를 통보하면서 파문의 중심에 섰다. 롯데 산하 롯데유업으로 출발한 푸르밀은 2007년 분사했다. 고 신격호 롯데 창업자의 동생인 신준호 회장이 지분 100%를 인수했다. 한때 매출이 3000억원이 넘었고, 5년 전까지만 해도 흑자였다. 2018년 전문경영인이 물러나고 신준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환 대표가 경영을 맡은 뒤부터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푸르밀 노조는 신 대표에 대해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인성을 바탕으로 어떤 조언도 귀담아듣지 않고 무능력한 경영을 해 적자 구조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오너 경영체제가 오히려 지금 같은 위기와 산업 패러다임 대전환기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전자상거래 등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 분야에서 하루가 다르게 혁신이 일어나는 것과 달리 전통 재벌기업이 포진된 기업 간 거래(B2B) 분야는 잠잠하다. 중간재 사업, 즉 제조업에선 혁신할 기회도 유인도 전혀 없다시피 한 실정”이라면서 “재벌 소유·지배 구조 때문인데, 총수 일가는 급격한 사업 재편으로 자신들의 지배권이 흔들리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이런 구조는 탄소중립으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는 가운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주요 대기업 총수 대부분은 너도나도 비상경영에 들어가고 투자도 줄이며 몸을 사리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전례 없는 악조건에 처했다고 판단하고 올해 10조원 후반대였던 SK하이닉스 투자 규모를 내년엔 50% 이상 감축하기로 했다. 2008~09년 금융위기 수준에 버금가는 투자 축소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도 9조2000억원이던 올해 투자 규모를 8조9000억원으로 줄였다. 구광모 LG 회장은 미국에 1조7000억원을 들여 지으려던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단독 공장 투자계획 재검토에 들어갔다. 

다만 이재용 회장 취임의 컨벤션 효과가 필요한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인위적 감산은 없을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신동빈 회장에서 아들 신유열 롯데케미칼 일본지사 상무로 이어지는 승계 구도를 공식화하고 있는 롯데도 2030년까지 총 10조원을 투자해 롯데케미칼을 명실상부한 그룹 대표주자로 키우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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