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는 잠시, 갈라지고 찢어진 대한민국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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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후 희생자 명단 공개·국조 등 두고 與野 충돌
‘정부 책임론’ 두고 지지층도 충돌…촛불·맞불 집회 예고도

참사는 왜 일어났을까. 누가 책임을 져야 하며, 그 책임은 어떻게 져야 할까. ‘이태원 압사 참사’ 후 약 2주, 대한민국은 이 같은 질문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애도 기간 휴전을 선언했던 여야는 극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오른 가운데 대통령실 참모와 장관의 경질 여부를 두고도 논쟁이 격화하는 양상이다.

정치권이 ‘참사 블랙홀’에 휩싸이자 민심도 동요하고 있다. 야권 지지층을 중심으로는 반발을 넘어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격한 목소리까지 터져 나온다. 반대 진영에선 ‘참사를 정쟁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10월의 비극이 잊히기도 전, 11월 대한민국이 반으로 쪼개진 모습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 5번 출구 앞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검추진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 5번 출구 앞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검추진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희생자 명단’ 두고 ‘패륜 논쟁’ 인 여의도

참사가 발생한 뒤 정치권이 집중한 건 ‘책임 소재’였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에 대한 경질·사퇴론이 인 배경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경찰 수사에 더해 국정조사와 특검까지 요구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공감대를 여야가 이뤘지만, 그 시기와 방법 등을 두고 여야가 이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여야의 화두가 바뀌었다. 민주당이 ‘희생자 명단 및 영정 공개’ 등을 요구하면서다. 주장의 요지는 간단하다. 평범한 장례식처럼 국민이 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보며 추모해야 한다는 얘기다. 또 이를 유가족이 원할 것이라 부연했다. 정부가 무명(無名) 분향소를 설치한 건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니란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1일 페이스북을 통해 “참다 못해 한 마디 한다. 유족이 원하는 방식으로 애도하는 것이 패륜이냐. 고인의 영정 앞에 그의 이름을 불러드리는 것이 패륜이냐. 참사를 정치에 악용하는 것은 국민의힘”이라며 “정쟁에만 매몰되면 상식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참사 앞에서도 이러면 도대체 어떡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표는 “제발 다른 것 신경쓰지 말자. 지금은 참사의 진실을 밝힐 시간이고, 유족과 피해자분들을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끌어안아야 할 시기”라며 “더불어민주당은 국민과 함께 이번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 유족과 피해자를 위한 마땅한 지원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니 국민의힘도 참사를 정치에 악용하는 일 그만두고 국정조사 동의로 진실을 밝히는 최소한의 예를 다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이 ‘유가족의 뜻’을 허락 없이 빌렸다는 것이다. 유가족 중 1명이라도 이를 원하지 않으면 희생자 명단을 공개할 수도 없으며, 또 이를 공당이 먼저 요구하는 것은 추모의 순수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즉, 민주당이 참사를 정쟁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1일 이 대표의 게시물이 올라온 지 약 30분 후 페이스북에 이 대표의 명단 공개 주장을 ‘패륜’이라고 규정지었다. 주 원내대표는 “이미 ‘유가족의 슬픔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패륜 행위’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의 패륜 행위는 멈출 줄을 모른다”며 “민주당은 패륜을 멈추고 공당의 금도를 지키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문재인 정부 국가보훈처는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의 공개를 거부한 바 있다. 대법원 역시 국가보훈처의 비공개 결정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유공자 명단은 개인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이라며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의 명단도 비공개가 정당하다면, 유족 대다수가 원치 않는 이태원 희생자 명단은 왜 공개되어야 하느냐. 더욱이 공개될 경우 희생자와 유족의 인격권 침해 등 심각한 2차 피해가 우려되는데도 말이다”라고 강조했다.

주 원내대표는 “희생자와의 존엄과 유가족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며 “국가적 참사와 비극을 매번 당리당략에 이용하려는 나쁜 습성을 당장 버리기 바란다”고 ‘국민의힘이 참사를 정치에 악용한다’는 이 대표의 말을 되돌려줬다.

촛불중고생시민연대 관계자들이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윤석열 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촛불중고생시민연대 관계자들이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윤석열 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찢어진 정치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국민들

정치권이 애도를 멈추고 정쟁을 시작하자, 국민도 갈라졌다. 과거 ‘세월호 참사’와 ‘조국 사태’를 두고 여야 지지층이 분열한 것과 유사한 양상이다. 민주당 지지층은 정부와 여당의 책임을 부각하는 동시에 ‘정권 퇴진운동’을 벌이려 한다. 반대로 국민의힘 지지층은 야당이 정쟁을 일삼고 있다며 ‘맞불 시위’로 대응하고 있다.

실제 토요일인 12일 서울 광화문 등지에서 보수·진보단체의 대규모 집회가 예정돼 있다. 경찰은 도심에 9만 명 이상이 운집할 것으로 보고 안전 관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11일 경찰에 따르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은 12일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서울 중구 서울시청~숭례문 교차로 구간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연다. 신고한 집회 인원은 7만 명이다. 경찰은 8만 명까지도 집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민노총은 이날 낮 12시 반부터 여의도, 을지로, 남대문 일대 등에서 단위 노조 17개가 개별 사전 집회를 한 후 본 집회에 합류할 예정이다.

진보 성향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도 이날 이태원 참사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다. 촛불행동 집회는 오후 5시부터 오후 8시까지 서울 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 11번 출구~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경찰은 이 집회에 1만 명가량이 모일 것으로 보고 있다.

오후 3시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앞에서는 촛불중고생시민연대 약 100명(경찰 추산)이 모여 ‘제1차 윤석열 퇴진 중고생 촛불집회’를 연다. 이 단체는 오후 5시까지 집회를 벌인 후 삼각지역으로 행진해 촛불행동 집회와 합류할 예정이다. 대학생들로 구성된 윤석열퇴진대학생운동본부 약 150명도 오후 3시에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뒤 촛불행동에 합류한다.

이에 맞선 보수 단체의 집회도 열린다. 전광훈 목사가 대표인 자유통일당 등은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진보 성향 단체들의 정부 규탄 집회 맞대응 집회를 연다. 경찰은 이 집회에 1만 명가량이 모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보수 성향인 신자유연대 회원 약 1000명(경찰 추산)도 촛불행동에 맞서 오후 3시부터 오후 8시까지 삼각지역 10번 출구에서 맞불 집회를 열 예정이다.

이태원 참사 후 반으로 쪼개진 대한민국. 전문가 일각에선 정치권이 공방을 멈추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초당적 협력에 나서야 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범인 찾기에 집중해서는 원인을 찾을 수 없고, 이는 곧 ‘제2 이태원 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김형준 명지대 특임교수는 “미국에서는 분열돼 있다가도 대형 사고가 나면 단합의 계기가 된다. 가령,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시 대통령 후보에게 석패했던 민주당 앨 고어 전 부통령은 9·11 테러 직후 ‘부시는 나의 최고사령관이다’면서 정적인 부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며 “야당인 민주당은 부시 대통령 퇴진도 내각 총사퇴도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안보 시스템의 전면 개편에 적극 협조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태원 참사의 핵심 요인은 정치가 아닌 시스템 때문”이라며 “따라서 수사는 수사대로 하면서 정쟁을 멈추고 전문가를 중심으로 초당적으로 정책 수립에 필요한 진지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향후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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