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동물 학대에 지구도 병들어간다 [배정원의 핫한시대]
  •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8 13:05
  • 호수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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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심이 만든 밀집사육 방식 공장식 축산의 폭력성,
결국 인간의 재앙으로 되돌아올 수도

지난주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아버지의 고향 선산에 다녀왔다. 어른들과 선산에 올랐다가 먼저 내려오는 길, 커다란 동물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작은 외양간 앞에서 소에게 물을 떠주는 동네 어르신에게 물으니 ‘소 울음소리’라고 하셨다.

“소가 우네요?” “그럼 소가 울지. 아파도 울고, 발정 나도 울고, 새끼소랑 떨어져도 몇 날을 운다오.” 소가 운다는 것을 생각도 못 했다. 서울에서 평생을 산 필자가 소 울음소리를 들어볼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필자가 보는 소는 대체로 정육점에서 상품이 된 소였으니까.

필자가 갔던 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마을은 ‘송아지 거세하는 날’이라 수의사가 왔다고 했다. 그래선지 이곳저곳의 축사에서 길게 끄는 우렁한 소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강원도 춘천시의 한 돈사에서 돼지들이 구제역 확산에 대비하기 위해 농민이 뿌리는 소독약을 바라보고 있다.ⓒ연합뉴스

소·돼지·닭, 이제 가축이 아니라 공산품 돼

소의 울음소리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들이 사람의 이익에 의거해 동물들을 다 거세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소도 거세하고 돼지도 거세하고, 반려동물이라면서 고양이도 개도 거세한다. 심지어 길에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나 개들도 중성화수술이 대책이라며 거세한다. 그런데 길고양이의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한 중성화수술은 그들의 자손을 끊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길이다. 거세한 수컷 길고양이는 남성성을 잃는다. 그래서 공격 본능도 줄어들고, 자신을 지킬 힘도 잃게 된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가 자신의 영역을 다른 길고양이로부터 지켜낼 수 없는 것이다.

암컷은 영역싸움에서 수컷이 꽤 봐주는 대상이지만, 중성화수술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암내가 나지 않는다. 야생의 세계에서 생식할 수 없는 암컷을 돌봐주는 수컷이 있을까. 중성화수술은 특히 아파트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고양이나 개와 사는 사람에게나 유용할 뿐, 반려동물인 그들에게도 야생에서 사는 이들에게도 생식력과 생존력을 잃게 하는 방책에 다름 아니다.

개와 고양이야 가까스로 반려동물의 자리를 보존하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소나 돼지, 닭은 가축이 아니라 공산품이 돼버렸다.

1990년대부터 미국의 무료 원조 옥수수를 소비하기 위해 권장되었다는 밀집사육 방식의 공장축산이 주가 되었다. 생산성에도, 사람들의 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구에도 부응할 수 있었기에 그 방식의 폭력성에도 더욱 환영받았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 가면 마당에서 암탉이 병아리들을 몰고 다녔다. 암탉은 병아리들에게 지렁이를 잡는 법을 시범 보이기도 하고, 모래목욕을 하는 것을 가르쳤다. 마당에 쌀이나 잘게 썬 푸성귀를 뿌려주면 모여들어 부리로 쪼아 먹느라 야단이었다.

아침이면 수탉이 횃대에 올라 기세 좋은 울음소리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서울에서 손님이 왔으니 살찐 암탉을 잡는 것은 그 집 젊은 남자가 했고, 잘 손질된 닭은 밥상에 귀한 백숙이 되어 온 식구를 기쁘게 했다. 소는 그 집의 큰 일꾼으로 봄엔 논밭을 갈았으며, 겨울엔 추울까 봐 가마니로 옷도 해 입히고, 콩을 넣어 먹음직스러운 여물을 끓여주기도 하면서 애지중지 길렀다.

50년 전만 해도 서울에서조차 고기를 그렇게 자주 먹지 못했다. 불고기로 갈비로 먹는 것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고, 거의 물을 많이 넣어 국을 끓여 나눠 먹었다.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닭고기든 그 살로만 굽거나 볶아서 배를 채우는 일은 잔치처럼 특별한 날에나 가능했는데, 1990년대부터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등심이니 삼겹살이니 하며 양념도 없이 구워 먹기 시작했다. 이 유행은 계속돼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고 국민의 고기 먹어치우기는 1980년대 1인당 11.3kg에서 2019년 1인당 54.6kg로, 무려 5배가량 증가했다. 이 모두 공장식 밀집축산 방식이 가져온 ‘쾌거’였다.

 

감금·학대·살해가 그들의 운명이 된 시대

그런데 공장식 축산은 소나 돼지, 닭이라는 동물에게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아니 학대에 가까운 방식이다. 닭들은 A4 용지보다 작거나 조금 큰 케이지에 갇힌 채 육계는 40일, 알을 낳는 닭은 20개월까지 산다. 그나마 이 닭들은 거의 암탉이고,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거나, 사료의 재료로 사용된다. 또 좁은 공간에 갇혀 있으니 날개도 펼 수 없고, 깃털 고르기도 할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스트레스와 공격성이 심해져 다른 닭을 공격할까 봐 부리와 발가락을 자른다. 너무 밀집해 있기 때문에 닭들은 면역력이 떨어져 감염되기 쉽고, 그 감염은 빨리 퍼져 나가기 때문에 항생제를 많이 써서 ‘항생제 달걀’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지역 감염은 걷잡을 수 없으면 산 채로 살처분 대상이 되기도 한다. 흙이 아니라 뜬 장에서 밤낮으로 서있어야 하기에 관절염이나 온갖 염증에 시달린다.

우리가 우유를 먹기 위해 암소는 임신과 출산을 계속해야 하고, 송아지는 우유를 빼앗겨야 한다. 돼지 역시 창문도 없는 집단 축사에 갇혀 진흙목욕은 꿈도 못 꾸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다. 꼬리가 잘리고, 송곳니는 뽑히고, 태어나자마자 어린 수컷은 마취도 없이 거세된다. 분만사의 암컷들은 서있거나 한쪽으로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우리에 갇혀 3년 동안 출산을 거듭하다 결국 도축된다. 닭은 자연수명이 15년, 소·돼지는 20년 정도라고 하지만, 우리 주변의 이들이 자연사하는 것은 본 적이 없기에 실제 얼마나 사는지는 잘 모른다. 그야말로 감금·학대·살해가 공산품이 된 그들의 운명이다. 인본주의의 약점과 다른 개체에의 폭력성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고기를 덜 먹고, 조금이라도 동물 복지가 제공되는 곳에서 그들을 키우고, 채식 중심의 식습관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동물들은 감정이 없을까? 동물들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고, 자연사하도록 보호하는 생추어리의 체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동물들에게 감정과 지각력이 있음을 안다. 새끼소와 헤어지면 며칠은 운다는 어미소는 애착의 감정을 느끼고, 도축장에 들어설 때 두려움으로 운다고 한다. 또 같이 사는 이가 슬퍼할 때 가만히 옆에 와서 몸을 대고 앉는 고양이에게 위로의 느낌을 받아본 경험은 어떤가. 돼지는 지능도 높고 감성도 풍부해 부모나 친구가 죽으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곡기를 끊고, 잠을 계속 자는 등으로 오래 애통해한다는 동물이다.

우리는 여전히 펄펄 끓는 해물탕에 살아있는 낙지를 넣으며 좋아하지만, 영국에서는 통감을 느끼는 뇌가 있다는 이유로 갑각류와 문어 같은 두족류가 살아있을 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죽이면 벌금형에 처한다. 또 유럽의 여러 나라는 ‘동물이 물건이 아니고 지각력이 있는 생명체’임을 인정한다. 독일에서는 1986년 동물을 인간과 비슷한 동료로 여기는 동물보호법을 개정한 바 있다.

이집트에서 열리고 있는 제27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7)에서 병들어가는 지구의 실체가 다시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육식이 지구 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한다는 건 이미 다 드러난 사실이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식물·동물과 나누어서 살아가는 공동체다. 더 이상 폭력적으로, 사람인 우리의 이익을 중심으로만 그들을 이용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소 생추어리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소를 구조한 이들이 소를 ‘마리’로 부르지 않고 ‘명’으로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도 소중한 한 생명이라는,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생명이라는 인식, 여기서부터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인본주의를 본다.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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