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사라진 시장,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다 [권상집의 논전(論戰)]
  • 권상집 한성대 사회과학부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20 17:05
  • 호수 172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레고랜드가 키웠고 흥국생명이 화룡점정 찍어
실타래 풀어야 할 정부와 중앙은행의 ‘엇박자’ 우려

2004년 2월 개봉한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는 영화가 있다. ‘코미디·로멘스’라는 복합장르가 영화 홍보에 쓰였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할 때 사람 대신 공공기관 또는 정부의 문을 두드리며 하소연한다. 신뢰의 최후 보루 그리고 지급보증의 최종 관문은 바로 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이 불변의 진리가 강원도의 의사결정으로 뒤집어졌다.

레고랜드 사태는 금융시장에서 믿을 사람이 없는 것을 넘어 정부도 이젠 믿기 어렵다는 결론 하나로 요약된다. 국내 최초의 글로벌 테마파크를 목표로 한 레고랜드는 엔터테인먼트 영역이 아닌 파이낸스 리스크 영역으로 스토리를 써내려갔다. 그 결과, 레고랜드는 희망과 즐거움의 땅이 아닌 지옥과 불신의 땅이라는 연관검색어를 남겼다. 불신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강원도가 오픈한 후 흥국생명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레고랜드와 관련된 기사가 수많은 언론사와 경제지를 통해 전달됐지만, 이를 명확히 이해한 대중은 많지 않다. 쉽게 생각하자. 강원도를 맡고 있는 김진태 지사가 강원도가 보증한 부채 2050억원을 갚지 않기 위해 레고랜드의 개발 주체인 강원중도개발공사의 회생 신청을 선언한 것만 기억하면 된다. 든든한 안전판을 자처한 강원도가 최후의 보루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선언한 것이다. 시장에 핵폭탄이 투하된 셈이다.

ⓒ연합뉴스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에서 촉발된 채권시장 자금경색 상황을 타개하고자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했지만 우려는 여전하다. 사진은 10월24일 춘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의 모습ⓒ연합뉴스

시장 덮친 ‘불확실성’이라는 핵폭탄

금융시장이 극도로 경계하는 건 바로 불확실성이다. 그래서 금융시장에선 늘 담보를 강조하고 누가 부채를 맡을 최후의 보루인지를 확인하고 또 검증한다. 강원도를 의심한 이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레고랜드는 공사 과정에서 유물과 비리가 연이어 나오며 완공이 늦어졌다. 그사이 수천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지만 시장과 투자자는 안심했다. 지방정부의 지급보증은 금융시장에서 신뢰의 핵심 지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김진태 지사는 불공정 계약이라며 레고랜드 유치 과정에 의심을 표명해 왔다. 그러나 의심을 표명한 것과 지급보증을 거부한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지방정부도 정부라는 점을 감안해 안심하고 돈을 빌려준 투자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자금줄이 차단되자 프로젝트 파이낸싱의 주체인 건설사와 증권사 역시 줄줄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관련 업계에서 강원도의 결정이 시장에 핵폭탄을 던진 것과 같다고 얘기하는 이유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은 건설, 부동산 등에 활용하는 대출 방식이다. 수많은 지자체와 기업은 수천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지금까지 부동산 PF시장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다. 그러나 금리가 지속적으로 인상되며 분양시장이 얼어붙기 시작했고 레고랜드 사태로 자금 유동성 위기가 전방위로 확산되면서 건설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강원도의 1차 핵폭탄은 이내 흥국생명의 2차 핵폭탄으로 이어졌다.

흥국생명이 11월1일 5억 달러 규모의 외화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콜옵션 행사를 취소했다는 소식은 국제시장을 향해 국내 채권 신뢰도의 추락은 끝이 없음을 알리는 시그널과 같았다. 신종자본증권은 원금 상환 없이 이자만 계속 지급하는 채권을 의미하는 영구채를 말한다. 그러나 보통 5년 뒤 조기 상환(콜옵션 행사)을 통해 자금을 갚는 것이 금융시장의 상식이다. 흥국생명은 이를 거부해 금융시장의 상식을 뒤엎었다.

자금경색이 국내를 넘어 국제시장과 블룸버그 등 해외 언론에까지 알려지자 강원도 그리고 흥국생명도 기존 의사결정을 번복하고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세계 최고의 신용평가기관 중 하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국내 보험사의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하자 수수방관하던 정부 역시 사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금융시장이 말하는 리스크 프리미엄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레고랜드가 키웠고 흥국생명이 화룡점정으로 사태를 각인시킨 ‘돈맥경화’를 풀기 위해 중앙정부, 금융기관, 태광그룹 등이 총동원되며 사후약방문과 같은 전형적인 엇박자 행보가 지금 전개되고 있다. 정부는 50조원이라는 거액을 통해 시장에 퍼진 불확실성이라는 불을 진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50조원 혈세로 채권시장을 뒷받침하겠다고 언급했으나 이번 대처는 중앙은행과 정책 방향성이 달라 또 다른 혼란을 가중시킨다.

미국의 금리 인상 여파로 한국은행은 1년 내내 금리를 인상하며 긴축정책을 펼치고 있다. 유동성 축소의 어려움에도 한국은행이 고금리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반대로 정부는 레고랜드와 흥국생명이 키운 공포를 완화하기 위해 혈세를 시장에 풀어 회사채와 어음을 거둬들이기로 결정했다. 한국은행이 긴축을 얘기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돈을 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시장은 불확실성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받아들인다.

이번 사태로 우리는 금융시장에선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미증유의 상황이 도래했음을 경험하고 있다. 김진태 지사가 야기한 정치적 위기는 경제적 위기로 전환됐고 그 대가는 열심히 노력한 모든 국민에게 50조원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격이 됐다. 고금리 시대, 국민은 지급보증을 거부한 지방정부와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기업을 바라보면서 시장의 불확실성이 만든 회오리의 여파를 온몸으로 또 한번 체감해야 한다.

 

尹 정부, 비상경제민생회의 가동 시급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불확실성이 팽배할 때 금융위기는 시작된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위기는 늘 소상공인, 중소기업에서 시작한다. 시장은 가장 먼저 이들을 대상으로 자금이라는 빗장을 걸어 잠그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행은 긴축을 명령하고 있고 정부는 유동성을 명령하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의 엇박자는 시장의 엔트로피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신뢰는 사라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줄곧 경제가 위기임을 강조했다. 언론을 통해 비상경제민생회의를 공개할 정도로 경제 이슈가 국가의 최우선 과제임을 공공연히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정부가 시장의 자유를 외치는 동안 일부 정치인과 기업은 시장을 향해 채무를 불이행하겠다는 자유를 외쳤다. 생각 없이 던진 메시지의 부메랑 효과는 혹독하다. 이제 진짜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시작해야 한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