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경쟁 꿈꾸는 30대 절대 권력자 빈살만의 방한 노림수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9 10:05
  • 호수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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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사이에서 철저한 사우디 국익 우선주의 추구
탈석유 미래 경제·첨단무기 강화 위해 한국에 관심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에서 숱한 화제를 뿌렸던 무함마드 빈살만 빈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총리가 11월17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서구에서 MBS(무함마드 빈살만,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라는 약자로 불리는 빈살만의 방한은 여러모로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2020년부터 지구촌을 뒤덮은 코로나19 팬데믹과 올해 2월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세계 경제위기 속에 중동 오일머니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유일하게 웃고 있는 글로벌 권력자의 방한이기 때문이다.

빈살만은 공식 직함이 왕세자지만 2019년부터 대외활동을 최대한 줄이고 있는 86세의 연로한 살만 국왕을 대신해 사실상 국정을 좌우해 왔다. 이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 9월27일 살만 국왕으로부터 총리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다. 사우디에서 총리는 국왕이 겸하는 게 관례였지만, 빈살만은 이를 물려받으면서 명실상부한 사우디의 절대 권력자이며 사실상 사우디의 국왕임을 만천하에 선언한 셈이다. 빈살만은 서구에서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린다.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막강한 인물이라는 의미다. 그런 그의 한국 방문이기에 국내에서도 뜨거운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11월17일 서울 용산구 관저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 겸 총리와 회담을 가진 후 관저 내 정원을 걸으면서 환담하고 있다.ⓒ연합뉴스 UPI 연합
윤석열 대통령이 11월17일 서울 용산구 관저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 겸 총리와 회담을 가진 후 관저 내 정원을 걸으면서 환담하고 있다.ⓒ연합뉴스

네옴시티 건설 위해 한국 기업과 밀착 의지

빈살만은 11월17일 새벽 한국에 도착해 이날 오전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오찬을 함께한 데 이어 오후 5시엔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국내 8개 대기업 오너들과 1시간 정도 차담회를 했다. 이 자리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 부회장이 함께했으며, 이재현 CJ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이해욱 DL그룹 회장, 정기선 현대중공업 사장도 합류했다. 이에 앞서 사우디의 칼리드 팔리흐 투자부 장관이 11월10~11일 한국을 먼저 찾아 1박2일 동안 머물며 국내 주요 기업인 20여 명을 만나고 돌아갔다. 이미 사전 정지작업이 완료된 것이다.

빈살만이 왜 왔는지는 그의 방한에 맞춰 사우디 투자부가 11월17일 한국의 주요 기업과 맺은 모두 21건의 투자·업무 협약(MOU)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업 규모는 각각 조 단위다. 규모와 함께 주목할 부분이 방향성이다. 한결같이 첨단기술과 친환경을 추구하는 미래지향적 분야다.

현대로템은 네옴시티 철도, 삼성물산은 그린수소와 모듈러 주택, 롯데정밀화학은 고부가 정밀화학, 코오롱은 스마트팜 등과 관련한 MOU를 사우디 투자부와 각각 체결했다. 원자력·수소·신재생 플랜트 전문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와는 주조·단조 공장 관련 MOU를 맺었다. 빈살만이 추구하는 탈석유·첨단기술·친환경의 새로운 사우디 미래 경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빈살만은 단순히 ‘경제 다각화’라는 용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파격적인 경제 혁신과 도약을 꿈꾸고 있다.

과거 한국이 중동에 진출해 외화를 벌었던 건설 분야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한국도 글로벌 중추 국가로 발전했고, 석유로 벌어들인 엄청난 자금을 바탕으로 탈석유의 미래 경제를 추구하는 사우디의 눈높이도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빈살만은 이번 방한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야심 찬 프로젝트인 네옴시티 건설을 위해 한국 기업과 밀착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줬다. 한국에 기회의 문이 열린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1월17일 서울 용산구 관저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 겸 총리와 회담을 가진 후 관저 내 정원을 걸으면서 환담하고 있다.ⓒ연합뉴스 UPI 연합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7월15일(현지시간) 사우디 제다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와 주먹 인사를 나누고 있다.ⓒUPI 연합

군사강국 꿈꾸며 한국과의 국방 교류 원해

빈살만은 2016년 사우디 미래 경제의 청사진인 ‘비전 2030’을 발표한 데 이어 2017년에는 그 세부 계획의 하나로 총사업비 5000억 달러(약 670조원)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네옴(미래)시티의 건설 계획을 공개했다. 네옴시티는 사우디 서북부의 홍해와 아카바만에 둘러싸인 타부크주의 사막과 산악 지역에 서울 면적 44배인 2만6500㎢ 면적의 저탄소 첨단도시를 건설해 기술 흡수와 관광·레저·친환경 분야의 도약을 이루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다.

철도는 2조5000억원 규모로, 성사되면 한국 고속철도의 첫 수출이 될 전망이다. 주목할 점은 사우디 국부펀드인 공공펀드 자다(PIF Jada)가 삼성물산·한국전력·포스코·한국석유공사와 8조5000억원 규모의 협약을 맺고 그린수소와 암모니아 사업에 나서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프로젝트의 일부다. 사우디 국영기업인 아람코의 자회사로 한국의 석유사업을 총괄하는 에스오일은 빈살만 왕세자의 방한에 맞춰 현대건설과 손잡고 7조~8조원을 들여 울산산업단지의 석유화학 2단계 사업인 샤힌(아랍어로 매)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빈살만은 1985년 8월31일생으로 37세다. 1984년 1월8일생으로 38세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보다 한 살이 적다. 그런 빈살만이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부친인 살만 빈압둘아지즈가 사우디 국왕에 즉위한 2015년 1월23일이다. 살만 국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이 2011년 11월부터 유지하던 국방부 장관 자리를 아들인 빈살만에게 물려줬다. 사우디는 빈살만이 국방부 장관에 오른 직후인 2015년 3월, 이웃 나라인 예멘에서 2014년 시작된 이슬람 수니파 중앙정부와 시아파인 후티 반군 사이의 종파 내전에 참여했다. 이웃 산유국인 아랍에미리트(UAE)와 이집트·수단·바레인 등을 끌어들였다. 사우디는 15만 병력과 1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내전 개입의 중추가 됐다.

이렇다 보니 지난 9월 총리에 오르면서 국방부 장관은 자신의 동생에게 넘겼지만 빈살만의 국방과 방위산업에 대한 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3년 전 방한했을 때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방문해 “통째로 사가고 싶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겉으로는 네옴시티 건설과 한국 대기업의 첨단기술, 그리고 투자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지만 내심으론 한국과의 국방 교류, 특히 탄도탄 요격미사일인 천궁-Ⅱ를 비롯한 첨단무기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를 향해 이란산으로 추정되는 탄도미사일을 수시로 발사하고 있어 이를 차단할 요격미사일 물량 확보가 시급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들여오려면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동안 미국은 이를 통해 사우디를 압박하고 견제해 왔다. 이웃한 UAE가 천궁-Ⅱ를 도입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보다 자유로운 국제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빈살만의 뜻을 관철하려면 사우디는 한국산 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빈살만이 1932년 그의 조부인 압둘아지즈 빈압둘라흐만 알사우드가 건국한 사우디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과감하게 시작한 개혁가라는 사실이다. 빈살만이 국왕에 오르면 초대 압둘아지즈 국왕의 손자대에서 나온 첫 군주가 된다. 아버지대처럼 군주를 도와줄 형제도, 사촌도 충분하지 않다. 오로지 실적으로 인구의 65%를 차지하는 35세 이하 청년 인구의 환심을 얻어야 한다. 빈살만이 중세국가 분위기의 사우디를 현대 이슬람국가로 바꾸는 개혁에 나선 이유다.

 

부정적 이미지 탈피 위해 문화 개혁 주도

빈살만은 국정을 이끌면서 문화적으로는 살라피즘으로 불리는 엄격한 이슬람사회를 현대적 이슬람사회로 바꾸는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사우디를 지배하는 사우드 왕실은 18세기부터 이슬람 경전인 쿠란(코란이라고도 함)에 적힌 대로 살아야 한다는 와하비즘(살라피즘이라고도 함)을 따라왔다. 당시 이슬람 개혁운동가 무함마드 빈압둘 와하브와 사우드 왕실이 손잡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우디 여성은 외출할 때 아바야라고 불리는 전통의상을 입어야 한다. 얼굴만 남기고 온몸에 두르는 옷이다. 이와 함께 여성은 운전할 수 없으며, 외출할 때 반드시 남성 가족·친족 후견인을 의미하는 마흐람을 대동해야 했다. 여성의 결혼과 취업, 그리고 해외여행도 마흐람의 허락이 필요했다. 하지만 빈살만은 이슬람 현대화라는 명분으로 개혁에 나섰다. 사우디는 아바야를 거주 외국인 여성에게도 강요했지만 최근 들어 외국인에 대한 규제는 풀었다. 무엇보다 여성의 운전과 해외여행을 자유화했다.

빈살만 하면 아직도 ‘카슈끄지 살해’ 배후의 폭군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꼬리표처럼 붙는다. 언론인 카슈끄지는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오다가 2018년 11월 살해당했다. 이런 이미지를 불식시키려는 빈살만의 개혁은 문화에서 두드러졌다.

2018년 영화관을 합법화한 데 이어 2019년에는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해외 음악인의 공연을 허용했다. 미국 여성 팝가수 머라이어 캐리를 시작으로 미국 남성 가수 저스틴 비버 등이 사우디에서 공연했다. 한국의 BTS는 2019년 11월11일 비아랍권 가수로는 처음으로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킹파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3만 명의 관객이 모였다. 내년 1월에는 K팝 걸그룹 ‘블랙핑크’의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다. 여성의 스포츠 경기 관람도 허용했다. 모든 행사를 시작할 때 비스밀라(하느님의 이름으로)로 시작하는 쿠란의 첫 구절인 알파티하를 독송하는 이슬람의 나라 사우디에서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다.

빈살만은 국제사회에서 국익 우선주의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왔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7월 중동 순방 중 사우디를 방문해 함께 모인 중동 산유국에 석유 증산을 요청했지만 빈살만은 이를 무시하고 외려 감산을 결정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을 당황하게 했다. 석유 수출로 외화를 확보해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으로 사용해야 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고유가는 그야말로 호재가 된다. 고유가는 네옴시티 건설과 비전 2030에 필요한 자금 마련에도 도움이 된다. 노련한 국제전략가 빈살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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