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미술 대작 사건에 취향 갈리는 이유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2.04 11:05
  • 호수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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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존’ ‘싫존주의’ 등 신조어 미술계에도 동일하게 적용
서로 다른 미술 취향이 공존하는 방법 고민할 때

서울의 자치구 7곳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들을 연합시킨 전시회를 봤다. 일곱 자치구는 강서, 관악, 구로, 금천, 동작, 양천, 영등포로 전시명이 《서.남권 미술전》이라 붙었다. 매해 열리는 정기전인 것 같았다. 전시장은 양천문화회관이었고, 전시 도록에 양천구청장과 양천구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축사가 붙어있었다. 출품작 가운데 꽃그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여성 누드와 한적한 시골 정경을 옮긴 풍경화까지 아카데미즘 미술전이다. 각 구별로 운영하는 문화회관에선 별도의 정기전도 열리고 있었고, 출품작 구성은 비슷했다. 꽃그림, 누드, 구상화. 구청장과 지역구 의원들의 축사가 적힌 도록. 그리고 전시 주최 기관은 미협(한국미술협회)이었다.

신제남전업미술가협회 이사장(64)과 미술단체 관계자들이 2016년 6월14일 춘천지검 속초지청에 그림 대작(代作) 의혹을 받고 있는 조영남씨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하고 있다.ⓒ뉴스1

구사하는 언어가 다른 미협과 주류미술

오래전 이야기지만, 일제 시절 조선미술전람회를 이은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 한국 미술계의 등판 무대였던 세월이 꽤 길게 있었다. 하지만 작가 선정 및 수상작 결정에 학연과 지연이 작용하는 정실인사 문제, 주류 미술의 흐름에 뒤떨어진 화풍 등으로 1981년을 끝으로 국전은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국전풍의 작업은 뒤에 생긴 미전(대한민국미술대전)이 이어받았고, 국가에서 관여하지 않고 미협이 주관처가 됐다. 전국에 지부를 둔 미협은 국내 미술계에서 큰 파이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미술평론을 전업하는 나조차, 미협이 주관하는 전시장에 간 적도, 글을 쓴 적도 없다시피 한다. 지명도 있는 미협 작가로 누가 있는지도 전혀 모른다. 앞서 자치구의 전시회를 보게 된 건 가까운 인척이 초대작가로 참여한다고 해서 축하차 방문한 예외적인 경우였다.

현장 미술평론가가 국내 최대 미술협회 전시에 왜 어두울까. 서로 구사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미협 회원의 작품을 읽는 법에 서툴다. 그쪽 역시 내가 활동하는 주류 미술판의 흐름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영어와 독일어가 유사한 철자의 단어를 공유하는 건 게르만어라는 같은 계통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문법과 발음 차이가 커서 외관상 유사하되 의사소통은 가능하지 않은 것과 같다.

미협을 필두로 무수한 ‘협회 미술’은 회원제로 운영되며 친목의 성격도 강하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과 유력한 국공립, 사립미술관에 초대되는 작가 중에는 협회와 무관한 미술가가 다수다. ‘올해의 작가상’이나 ‘MMCA현대차 시리즈’처럼 국내 미술계의 큰 미술상 수상작가도 마찬가지고,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초대작가도 협회에서 배출된 작가군과는 무관한 이가 선정된다. 똑같은 미술이지만 언어와 신념이 다르다. 미적 신념과 취향은 서로 달라도 마찰 없이 각자도생한다. 이런 묵인이 깨진 예외적인 일이 2016년 조영남 대작 사건 때 있었다. 한국미술협회, 한국전업미술가협회, 목우회 등 11개 ‘협회 미술’ 측이 조영남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란 자신의 심신을 불사르는 정열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존감 있는 사람이다.” 조영남을 비판한 목우회 이사장이 미술 전문지에 기고한 칼럼의 지문 일부다. 과도하게 비장한 감이 있지만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와 ‘협회 미술’의 길은 갈라진다. 조영남 대작 사건 때, 그가 비판받을 이유가 적거나 없다는 논조로 그를 두둔한 글을 처음 기고한 미술평론가가 나였다. 3심까지 이어지며 4년을 끈 소송은 2020년 6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나왔다. 이로써 조영남을 비난했던 이들이 법원의 결정에 수긍했을까? 그럴 리가 없잖은가. 미적 신념과 취향은 논리로 반박되지 않는다. 정치토론 프로그램에서 논박당한 이가 자신의 정치신념을 바꾸는 걸 봤나? 논쟁에서 졌다는 게 오히려 그의 신념을 강화시키는 역설로 돌아온다. 정치신념과 미적 취향은 닮았다. 신념이나 취향을 지닌 이의 존재감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신념 혹은 취향이 반박될 때, 자존감도 같이 흔들린다.

양천구의 어느 유화반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 장면
양천구의 어느 유화반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 장면
양천구의 어느 유화반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 장면
양천구의 어느 유화반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 장면
양천구의 어느 유화반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 장면
양천구의 어느 유화반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 장면
양천구의 어느 유화반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 장면
양천구의 어느 유화반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 장면

닮은 듯 다른 정치신념과 미적 취향

신념과 취향이 저격될 때 집단행동으로 저항하는 소동은 정치나 예술판에 국한되지 않고 도처에서 매일 일어난다. 2020년 서울 강남구 삼성동 SM타운 코엑스 아티움 앞에서 아이돌그룹 ‘엑소EXO’의 팬들이 ‘엑소’의 메인보컬 첸의 탈퇴를 요구하는 집단시위를 벌였다. 첸의 결혼 계획 발표가 원인이었다. 열성 팬에서 비토 세력으로 변한 일부 팬은 “엑소는 첸 개인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9년간 쌓아올린 위상에 극심한 손해를 입었고, 기혼자인 첸이 잔류하면 엑소의 이미지나 마케팅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며 시위했다. 첸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가 고려하고 판단할 일에 팬들이 관여하는 이 극성맞음은 어떻게 설명될까.

“그건 개인 취향 문제라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라는 양해 문구에 우리는 익숙하다. ‘취존(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같은 유명한 ‘짤’도 있다. 신념과 취향에 대한 저격이 자존감 붕괴와 동급이라는 공감이 저런 문장과 짤로 유통되는 걸 것이다. “싫어하는 것도 존중해 달라”는 ‘싫존주의’ 같은 동음이의어까지 있다. 한국 사회에서 곧잘 보도되는, 마음에 들지 않는 공공조형물을 철거하라거나, 손수 철거를 감행하는 소동도 자기의 신념이나 취향에 저촉되는 대상을 향한 몰이해와 옹졸함이 만드는 것이다. 이럴 때는 문화 상대주의에 수긍하게 된다. 그렇지만, 작품과 전시를 비평하고 판정하는 걸 업으로 삼는 내게는 딜레마다. 좋은 작품과 후진 작품은 존재한다. 여러 미술 심사와 공모는 작품을 걸러내는 일이다. 쉽진 않아도 예술품 중 옥석을 가리는 건 가능하며 이럴 때 문화 절대주의가 작동한다.

‘협회 미술’에 내가 거리를 뒀던 이유로 그들의 미적 언어에 서툰 점을 댔다. 그들의 미술을 판독하는 데 미숙한 건 사실이지만 꽃, 누드, 시골 풍경처럼 인습적인 도상을 주로 반복하는 점이 식상하며, 예술의 요건인 참신성을 떨어뜨린다고 내가 믿는 것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주류 미술은 불필요하게 난해하고 과유불급의 시각 언어를 쓴다. 견제를 받지 않고 내달리니 난해함의 자기 함정에 빠진 결과다. ‘협회 미술’이 그걸 견제할 적임자라 생각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두 종류의 미술이므로. 그럼에도 친분 때문에 방문했던 ‘협회 미술’풍 전시에서 이런 느낌이 왔다. 미술의 원점을 되돌아보게 하고, 일반인 미술 애호가의 미감을 확인시켜 주는 자리라는 인상. 서로 다른 신념과 취향은 상대를 대체하지 않고, 상대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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