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사망에 화들짝 놀란 시진핑의 이례적 행보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2.10 10:05
  • 호수 17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내 평가 안 좋았던 장 전 주석, ‘反시진핑’ 분위기 타고 이상 추모 열기
시 주석, 극진한 國葬 예우로 시위 정국 전환 고심

12월6일 오전 10시(현지시간)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11월30일 사망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추도대회가 거행됐다. 중국공산당·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중앙군사위원회 등 중국 최고 권력기관의 공동 주관으로 치러진 국장(國葬)이었다. 추도대회가 시작되자, 중국 전역에서는 3분 동안 사이렌이 울렸다. 이 3분 동안 주식·선물·외환 등 모든 금융시장 거래가 중단됐다. 당일에는 모든 스포츠 경기와 온라인 게임, 테마파크 등도 중단됐다. 가히 최고의 예우로 장 전 주석의 마지막을 추모했던 것이다.

실제 장례 기간 내내 시진핑 국가주석이 전면에 나섰다. 시 주석은 장례위원장을 맡아 12월1일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겨진 장 전 주석의 유해를 시자오공항에서 직접 맞이했다. 주목할 점은 운구 영접식에 시 주석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7명의 상무위원이 모두 참석했다는 것이다. 또한 시 주석은 베이징의 장례식장에서 장 전 주석의 유해 곁을 지켰다. 5일에는 바바오산 혁명공원에서 송별의식도 주도해 엄숙히 치렀다. 이 자리에서 장 전 주석의 시신은 화장됐다. 시진핑의 이런 모습은 근래 들어 보기 드문 행보였다.

12월5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관료들과 함께 장쩌민 전 주석의 시신을 향해 조의를 표하고 있다. 11월30일 별세한 장 전 주석의 시신은 12월5일 바바오산 혁명공원 묘지에서 화장됐다.ⓒAP 연합

시진핑, 장례 기간에 근래 보기 드문 모습 보여

시진핑이 장 전 주석의 장례식과 추도대회를 엄중히 여긴다는 것은 40여 분 동안 읽었던 추도사에서 드러났다. 그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직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중국은 서방에 혹독한 제재를 받았다”면서 “이 시기 장쩌민 동지가 최고지도자로서 개혁개방을 견지하고 이데올로기 사업을 전면적으로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 “개혁의 큰 국면을 성공적으로 안정시켰고 중국 발전의 견실한 기초를 마련했다”면서 “장쩌민 동지의 유지를 계승해 중국 특색 사회주의 발전에 끊임없이 새 장을 쓸 것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시 주석의 이런 발언은 지난 11월 하순 제로 코로나 정책에 반대해 중국 전역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거리시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마치 장쩌민의 추도대회를 빌려 중국인들에게 호소하는 듯했다. 달리 보자면, 시진핑 입장에서 장쩌민의 사망은 아주 절묘한 시점이었다. 장쩌민의 국장이 “공산당 물러나라” “시진핑 하야하라”라는 목소리까지 터져 나왔던 ‘반(反)정부’ 시위의 물결을 삽시간에 잠재웠기 때문이다. 물론 11월26일과 27일에도 산발적인 시위는 있었지만, 참여 규모와 요구 강도는 낮아졌다.

이번 국장은 개혁개방 이래 덩샤오핑(鄧小平) 다음의 두 번째 최고지도자 장례였다. 장쩌민의 사망 소식을 처음으로 알린 국영 CCTV의 웨이보 포스트에는 순식간에 100만 개가 넘는 추모 댓글이 달렸다. 장 전 주석을 친근하게 묘사한 추모 캐리커처가 중국 SNS에서 끊임없이 리트윗됐다. 오프라인에서는 수많은 시민이 고인의 고향인 장쑤성 양저우의 고택을 직접 찾아 헌화했다.

이런 광경은 1996년 이래 중국에서 살아온 필자의 눈에는 너무나 의외였다. 장 전 주석은 생전에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최고지도자였기 때문이다. 1926년 태어난 장쩌민은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을 몸소 경험했다. 이를 계기로 외세에 대한 강한 투쟁심을 갖추었다. 또한 상하이교통대를 다니면서 상하이와 처음 인연을 맺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사회주의 중국 건국 이후에는 줄곧 공업 분야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였다. 문화대혁명 때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공직에서 추방당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복권됐다.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이 테크노크라트를 대거 등용하면서 고위직으로 고속 승진했다. 1983년 전자공업부장이 됐고, 1985년에는 상하이시장 겸 부서기로 영전했다. 1987년에는 당서기까지 됐다. 장 전 주석의 운명을 뒤바꾼 사건은 톈안먼 사태였다. 당시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톈안먼광장을 점거한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 반대하고 오히려 시위대와 대화하자, 덩과 보수파는 자오를 추방했다. 그에 반해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처벌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 덕분에 덩의 눈에 들면서 공산당 총서기가 됐다.

다만 최고지도자로서의 권력은 1992년 제14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이후부터 휘둘렀다. 그 뒤 장쩌민은 중국을 세계 최대 개발도상국으로 등극시켜 금세기 초고속 성장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3개 대표론을 내세워 자본가 계급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해 시장경제를 완전히 자리 잡게 했다. 이런 업적에도 그는 여러 논란을 낳았다. 자신의 파벌인 ‘상하이방’을 구축해 그들의 권력 남용과 부패 문제가 201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도록 만들었다. 아들인 장헝은 여러 국영기업의 최고위직을 두루 섭렵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무엇보다 유명 연예인들과의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때 중국 가요계의 황후로 군림했던 쑹주잉과의 스캔들은 중국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재임 기간 내내 중국인들에게 ‘두꺼비’라고 불리며 놀림을 당했다. 두꺼비는 장 전 주석의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과 커다란 입을 희화화해 지어진 별명이었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이 집권한 이후 장쩌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12월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고(故) 장쩌민 전 국가주석 추도대회에서 다른 관리들과 함께 묵념하고 있다.ⓒAP 연합

“그래도 자유로웠던 장쩌민 집권기가 좋았다”

한 변호사는 필자에게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신분증만 소지하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누구나 할 말은 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고 회상했다.

장쩌민 전 주석의 장례가 제로 코로나 정책과 거리시위를 바꾸는 변곡점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실제로 추도대회 다음 날인 12월7일 충칭시와 광둥성이 공식적으로 도시 봉쇄를 해제했다. 충칭과 광둥은 11월 상순부터 중국에서 가장 많은 코로나19 확진자가 쏟아져 나와,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면 봉쇄에 들어갔다. 한 충칭 시민은 필자에게 “지난 한 달 동안 주민위원회가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제공해 주는 쌀·고기·채소 등으로 근근이 연명해 왔다”며 “만약 이번 주에도 봉쇄를 안 풀었으면 나부터 거리로 뛰쳐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중국 당국이 철저한 검열을 자행했지만, 온라인상에서는 11월말 대규모 거리시위를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 여전히 떠돌고 있다. 따라서 당국 입장에서는 추모 분위기로 국면을 전환하되, 도시 봉쇄를 해제해 중국인들의 불만을 잠재워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필자가 돌이켜봐도, 장쩌민 집권기의 중국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지금은 외국인에게 지문을 채취하고 어딜 가든 반드시 여권을 소지토록 하지만, 당시는 여권 정보면의 복사본으로 호텔 숙박이 가능했다. 자칫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현재에 대한 분노로 돌변할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