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새벽 3시에도 움직여야 하는 ‘삶’이 있다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1.01 08:05
  • 호수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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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가을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꼭 해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해 밤늦도록 끙끙거리다 새벽 3시쯤 바람을 좀 쐴 심산으로 거리에 나섰다. 인적은 거의 끊겼고, 가끔 취객 몇 명이 요란한 목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사이로 구부정한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자신의 몸집보다 큰 수레를 끌고 차량 통행이 드문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의 몸짓은 끊임없이 가녀리게 흔들렸고, 그때마다 수레에 실린 커다란 박스 뭉치가 곧 무너져내릴 듯 휘청거렸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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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나 연말연시로 들떠 있는 거리를 지나면서 다시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포함한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 추운 날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 쌓인 박스를 치울 것이고, 대다수 사람이 곤히 잠든 시간에 바삐 움직인 그들 덕에 인파로 북적였던 거리는 다시금 말끔한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이 한국노인인력개발원으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폐지수집 노인 현황·실태’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폐지수집 노인 수는 최소 1만4800명에서 최대 1만5181명이다. 그들은 하루에 평균 11시간20분간 12.3km를 이동하며 1만428원을 번다. 길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돌봄이 필요한 이웃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 그들에게 겨울은 여름철과는 비할 바 없이 가혹해 ‘지옥의 계절’이나 다를 바 없다. 방한에 필요한 비용이 훨씬 많이 드는 탓이다. 더군다나 올겨울은 전기·가스 요금까지 올라 버텨내기가 더 힘들어진 상황이다. 서민의 연료로 일컬어지는 등유 가격까지 크게 인상돼 기름 보일러를 틀기도 만만치 않다. 온기가 없는 좁은 방에서 추위에 맨몸으로 맞서야 하는 이가 그만큼 많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그 예견된 위험은 실제 비참한 결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2022년 11월25일 서울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65세 어머니와 36세 딸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건이 벌어졌다. 모녀의 집 현관문에는 5개월치 전기료 9만2000원이 연체됐음을 알리는 독촉 고지서가 붙어 있었고, 건강보험료 14개월치, 통신비 5개월치도 밀려 있는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경기도 수원에서 세 모녀가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한 채 숨져 큰 충격을 안긴 지 3개월 만에 또다시 일어난 비극이다.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해를 맞는 이 연말연시에도 새벽 3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을 포함해 하루하루를 추위 속에 떨며 보내야 하는 취약계층의 생활 약자들을 찾아내 돌보려면 더 많은 이웃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다. 국민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국민이 처한 어려움을 미리 듣기 위해 귀를 크게 여는 정부의 자세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다. 그들을 선제적으로 지원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방책을 촘촘히 챙기고 충분한 예산으로 그것을 뒷받침해야 한다.

지난 성탄절 저녁에 세상을 떠난 조세희 작가의 대표작 중에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이 있다. 도시 빈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 속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한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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