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현대차·SK·LG 등 미국 관료 출신 모시기 경쟁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3.03.26 10:05
  • 호수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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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연줄로 ‘미국發’ 제재 방어막 구축한 재계
미국 행정부 정책기조 급변에 따른 로비 총력전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연초부터 미국 관료 출신 영입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자국중심주의를 강화하면서 백악관을 상대로 로비를 담당하는 대관(對官)에 힘을 주는 모습이다.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한 국내 주요 기업들은 앞으로 미국 정부의 입법과 규제, 수출 통제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이에 미국 정부와 정치권에 인맥을 갖고 협상 및 대응 능력을 갖춘 전직 행정관료를 영입해 정책기조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왼쪽부터)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 앨릭스 웡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 대니 오브라이언 폭스코퍼레이션 수석부사장,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부비서실장 ⓒ연합뉴스·폭스 홈페이지·AP 연합

퓰너, 김승연 한화 회장의 40년 지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최측근이 한화그룹에 영입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최근 한화그룹은 대니 오브라이언 폭스코퍼레이션 수석부사장을 미국 태양광 사업과 관련한 정책 대응과 정부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할 ‘미국대관총괄임원’으로 영입했다. 오브라이언 총괄임원은 바이든 대통령이 상원의원이던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2008년 부통령으로 출마한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캠프에도 합류했다. 이후 로버트 메넨데스 민주당 상원 외교위원장 비서실장과 제너럴일렉트릭(GE) 임원을 거쳐 2018년 폭스코퍼레이션 수석부사장으로 영입됐다.

한화그룹은 친트럼프계 인사인 에드윈 퓰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아시아센터 회장도 영입했다. 퓰너 회장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40년 지기다. 김 회장과 퓰너 회장은 19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40여 년간 돈독한 친분을 이어왔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한미 현안은 물론이고 글로벌 경제 전반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눠왔다. 무엇보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측근이자 정책 멘토로 불린다. 퓰너 회장이 설립한 헤리티지재단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로 미국 정부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화그룹이 미국 정계 인사들을 잇달아 영입한 이유는 급변하는 미국 정책기조에 따라 북미 사업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재 바이든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기후변화 대응 및 법인세 인상 등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다. 미국은 올해부터 태양광 신규 공장 건설에 100억 달러(약 13조원) 규모의 투자세액을 공제해 준다. 태양광뿐 아니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와 관련한 세액공제 규모는 30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 태양광 모듈 시장 1위인 한화솔루션 큐셀부문은 2025년까지 미국 내 생산능력을 확대할 방침이다. 금액으로는 3조2000억원에 달한다. 한화큐셀은 이 투자로 IRA가 지속되는 10년간 연 1조원 규모의 세제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투자금액의 3배에 달한다.

앞서 삼성전자도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를 북미 지역 대외 업무를 총괄하는 임원으로 영입했다. 리퍼트 전 대사의 한국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및 미국 정치권에 대한 원활한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 중 한 명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상원의원이던 2005년부터 그를 보좌했고 오바마 행정부에서 외교안보정책을 담당하기도 했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후 국방부 아태 담당 차관보,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 등을 지내면서 ‘전문성과 지식을 겸비한 분석’라는 평가를 받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DC 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발언하고 있다. ⓒUPI 연합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DC 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발언하고 있다. ⓒUPI 연합

美 대관용 워싱턴 사무소도 잇달아 개설

LG그룹도 지난해 2월 미국 워싱턴DC에 신규 사무소를 개소하며, 공동소장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 부비서실장을 지낸 조 헤이긴을 영입했다. 포스코 미국법인은 2021년 9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에서 북핵 협상대표를 맡았던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를 고문으로 선임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쿠팡이 대북특별부대표를 역임했던 앨릭스 웡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를 공공관계 총괄 임원으로 영입하면서 미국 내 대관업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이 심화되면서 국내 기업들의 해외 대관 업무가 중요해지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당시 국내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입법과 규제, 수출 통제 등의 조치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글로벌 공급망이 새롭게 재편되고, 친환경 규제들이 속속 생기고 있다. 이에 따라 해외 진출 기업들이 현지 정부, 의회, 지방정부와 업무를 조율할 일이 많아지는 추세다.

국내 기업들이 미국의 거물급 전직 고위 관료를 영입하는 데는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정책 방향을 읽어내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함도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최근 미국 중서부 표심을 잡기 위해 제조업 확대를 약속했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 미국 내 사업을 확장할 수도 있지만,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미국의 요구에도 기민하게 대응하는 등 균형점을 찾아 나가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주요 대기업들이 해외 대관 조직을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월1일 SK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이 모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에 글로벌대외협력(GPA·Global Public Affairs) 조직이 신설됐다. GPA팀은 해외법인 관리, 사회공헌과 대외활동, 현지 정부와 소통하는 대관업무 등 현지 경영 현안을 지원하는 조직이다.
미국의 IRA 및 반도체법(CHIPS Act), 유럽의 핵심원자재법(CRMA) 및 탄소중립산업법(NZIA) 등 주요국의 자국 중심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함이다. SK하이닉스의 경우 기존의 인트라(INTRA·International Trade & Regulatory Affairs) 조직에 이어 글로벌 오퍼레이션 태스크포스(TF) 조직까지 새로 만들어 미국 반도체법 등 위기 대응에 나서고 있다.

국내 기업의 워싱턴 사무소 진출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삼성전자는 기존의 GPA 조직을 미 워싱턴DC를 중심으로 크게 확대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반도체(DS)부문 상생협력센터 역시 DS부문 대외협력팀으로 확대 개편한 것으로 전해졌다. 배터리 업계의 해외 대관 조직도 숨 가쁘게 활동하는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LG그룹이 워싱턴DC에 만든 해외 대관 전담조직은 물론 현지법인의 대관팀과 함께 미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전기차 리콜 이슈 및 전기차 보조금 지급 정책에 대응하고 있다.

이 밖에도 미국 워싱턴에 사무소를 낸 국내 대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SK그룹 △SK하이닉스 △포스코 △한화디펜스 △LIG넥스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이다.

삼성·SK·현대차그룹 등은 바이든 행정부 대관 역량 강화 추세와 맞물려 2022년 정·관계 로비에 역대 최고 금액을 지출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입법, 규제 동향을 살피고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자사 이익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로비 활동은 합법이다. 반도체, 배터리, 스마트폰 등 미국에서 대규모 사업을 하는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로비 활동이 필수나 다름없다.

미국 책임정치센터(CRP)가 운영하는 로비 자금 추적 사이트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그룹(삼성전자·삼성반도체·삼성SDI 미국법인)은 2022년 미국 로비 자금으로 579만 달러(약 76억원)를 썼다. 전년(372만 달러·약 48억원)보다 약 56% 증가한 수치다. 등록 로비스트도 32명에서 53명으로 역대 가장 많았다. SK하이닉스(SK하이닉스 미국법인·솔리다임)도 전년도 368만 달러(약 48억원)보다 43% 늘어난 527만 달러(약 69억원)를 지난해 미국 로비 자금으로 지출했다.

두 그룹이 미국에서 연간 500만 달러 이상의 로비 자금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과 SK는 미국 혁신경쟁법(USICA)에 가장 많은 로비 자금을 쓴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 혁신경쟁법은 미국의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와 미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 등 미국 경쟁력을 극대화해 중국의 기술 굴기에 대응한다는 취지다.

 

4대 그룹 대미 로비액도 역대 최대

현대·기아차(현대차·슈퍼널·현대제철·기아차 미국법인)도 지난해 역대 최고액인 336만 달러(약 44억원)를 미국 정·관계 로비에 사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현대차의 로비 자금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관련 활동 등에 쓰인 것이라고 이 단체는 분석했다. 4대 그룹의 주요 로비 대상 기관은 백악관·상원·하원·상무부 등이었다.

로비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 정부가 여전히 자국 보호무역정책을 강화하면서 해외 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미국에 투자한 반도체 기업에 정부 보조금을 받는 조건으로 일정 기준 이상의 초과수익은 반납하도록 했다. 아울러 한국의 자동차 수출에 악재가 되는 IRA 관련 내용을 사전에 전혀 파악하지 못해 국내 기업들이 발목을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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