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잊히지 않는 영화라는 꿈”에 부쳐, 《파벨만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25 14:05
  • 호수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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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화 그 자체’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

현존하는 누군가의 인생이 영화가 돼야 한다면, 누군가의 인생을 영화라 부를 수 있다면, 그건 당연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몫이 돼야 할 것이다. 분명 당신은 언젠가 적어도 한 번쯤은 그의 영화를 본 적이, 그것도 몹시 좋아해본 적이 있다. 《죠스》(1975), 《E.T.》(1982), 《레이더스》(1982)부터 이어지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쥬라기 공원》(1993), 《쉰들러 리스트》(1993),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A.I》(2001), 《캐치 미 이프 유 캔》(2003), 《우주전쟁》(2005)….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수많은 필모그래피는 지나치기가 더 어려운 수준이다.

《파벨만스》는 알려진 대로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다. 영화는 무려 반세기 동안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하고 또 위로해 왔던 예술가의 초상을 담아낸다. 그가 평생을 치열하게 누볐던 상업영화의 현장이 아닌, 한 가족의 가장 내밀한 시간들과 소년이 손에 쥔 8mm 카메라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뷰파인더 너머를 무대로 삼은 《파벨만스》는 아름답다. 나아가 ‘영화 그 자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영화 《파벨만스》 스틸컷 ⓒCJ ENM 제공

경이로움이 일생의 목표로 변하는 순간

극장에서 《지상 최대의 쇼》(1955)를 본 후, 어린 새미(마테오 조리안)는 기차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선로를 달려오는 기관차에 부딪힌 자동차가 종이뭉치처럼 날아가던 장면의 충격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누카(유대인 명절)에 장난감 기차를 선물받은 이후엔 매일같이 충돌을 재현하기 바쁘다. 아들의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엔지니어 아빠 버트(폴 다노)와 달리,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는 ‘자신만의 세상을 통제해 보고 싶은’ 새미의 바람을 구체적으로 읽어낸다. 기차를 자꾸만 부수는 대신 아빠의 8mm 카메라로 촬영해 여러 번 반복해 보자는 엄마의 제안 이후, 새미의 손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들려 있다.

청소년이 된 새미(가브리엘 라벨)의 하루는 친구들과 가족이 총동원되는 촬영 그리고 필름 편집으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 등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마주하는 순간도 여전한 그의 기쁨이다. 여느 날과 같이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던 새미는 우연히 엄마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포착한다. 그것은 가족에게 일어날 어떤 균열의 시작이자, 새미가 온전히 속해 있지만 결코 통제할 순 없는 세상이다.

원제 ‘Fabelmans’는 새미 가족의 성(姓)인 동시에 하나의 언어유희다. 동화(Fabel)라는 뜻을 지닌 독일어와 사람(Man)을 합쳐, 일생을 영화라는 동화이자 꿈에 바쳐온 스티븐 스필버그의 삶을 은유하는 단어로 만든 것이다. 스필버그 감독이 온전히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 영화 한 편을 완성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스스로 자신의 역작인 《E.T》의 ‘정신적 속편’으로 여긴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파벨만스》는 거장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화 《파벨만스》포스터 및 스틸컷© CJ ENM 제공
영화 《파벨만스》포스터 ⓒCJ ENM 제공

이 영화의 씨앗은 스필버그의 연출작 《뮌헨》(2005) 촬영장에서 탄생했다. 각본가 토니 커쉬너(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희곡을 쓴 것으로 유명한 커쉬너는 이후 스필버그의 《링컨》(2013),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2) 등의 각본을 담당했다)가 스필버그에게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을 질문하면서다. 그렇게 풀어놓은 스필버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오랜 시간 커쉬너의 세공을 거쳐 《파벨만스》의 각본으로 탄생했다. 스필버그는 “여러 경험에 비추어 만들었던 기존 연출작과는 달리 이번 영화는 나의 기억 그 자체”라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파벨만스》는 스필버그 영화 세계의 근간이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를 보여준다. 일례로 어린 샘이 스크린에서 처음 느낀 경이로움이 《쥬라기 공원》 등 블록버스터 무비를 향한 감독의 오랜 애정의 양분이 돼주었음을 감지할 수 있는 식이다. 스필버그 감독이 애리조나에서 보낸 10대 시절 만들었던 아마추어 필름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파벨만스》가 선사하는 작은 재미 중 하나다. 서부극 《더 라스트 건(The Last Gun)》, 《건스모그(Gunsmog)》를 비롯해 전쟁영화 《도피할 수 없는 탈출(Escape to Nowhere)》, 훗날 《미지와의 조우》(1982)의 토대가 된 SF 영화 《파이어라이트(Firelight)》 등을 찍고 편집하던 순간의 ‘소년 스필버그’가 이 안에 있다. 물론 모든 영상은 현재의 스필버그가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다시 촬영한 버전이다.

영화 《파벨만스》 스틸컷 ⓒCJ ENM 제공

영화가 사랑한, 동시에 영화를 사랑한 사람의 작품

소년이 영화와 사랑에 빠졌던 유년 시절은 한없이 아름다운 동화지만, 현실에 눈을 뜨는 과정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새미는 사랑하는 대상, 혹은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완벽하게 통제해둔 세상을 바라보던 자신의 카메라가 가려졌던 진실이나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도 의도치 않게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필름에 찍힌 무수한 이미지 중 무엇을 자르고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과정을 몸소 겪으며, 영화가 ‘편집의 예술’임을 체험하는 과정이 그를 단련한다. “예술이 하늘의 영광과 땅의 월계관을 선물하겠지만, 네 가슴을 찢어놓고 널 외롭게 할 것”이라는 삼촌 보리스(주드 허쉬)의 일갈도 날아와 박힌다.

그러나 결국 《파벨만스》는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맞서 영화라는 꿈을 향한 러브레터가 된다. 이 작품이 가장 소박하고도 중요하게 포착한 아름다움은, 편집기나 영사기 앞에서 필름을 들여다보는 소년의 말간 얼굴이다. 편집기로 하나하나 자르고 이어붙여야 하는 필름의 물성,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 스크린을 바라보고 앉은 관객들 사이에서 나란하게 터져 나오는 탄성과 웃음. 그 모든 것은 새미가 예술이라는 욕망의 가시밭길을 기꺼이 걷도록 만드는 마술과 같은 요소들이다. 어두운 옷장부터 거실 등 집의 구석구석을 배경 삼아 패밀리 무비가 상영되던 행복의 순간부터, 진실을 포착한다는 것이 때로 어떤 파괴력을 지니는지 고통스럽게 깨달은 가족들과의 시간을 통해 새미는 영화가 지닌 힘을 고루 알아간다. 《파벨만스》는 그렇게 평범한 얼굴을 한 가족 드라마의 외피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 더불어 영화를 향한 사랑과 예술의 본질까지 꿰뚫는 작품으로 나아간다.

언제나 할리우드가 이룰 수 있는 기술적 성취의 최전선에 서있는 테크니션이자, 고전영화의 문법에 점점 더 완벽하게 다가서고 있는 스필버그. 그는 몇 년 전 자신이 평생 사랑하고 몸 바쳐온 대중문화를 향한 헌사인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파벨만스》를 통해 온통 영화와 함께였던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다. 스필버그는 그 무엇보다 영화를 사랑한, 동시에 영화가 그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들에 점점 더 다가서고 있다. 영화의 말미, 청년이 된 세미가 ‘서부극의 제왕’ 존 포드 감독(1894~1973)을 만나는 일화는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년 거장 감독의 의지를 사랑스럽게 전달한다. 무언가에 평생을 건 사람의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하는 일은 이토록 벅차다.

요주의 인물, 자유로운 영혼 미치

미치는 어린 아들 새미가 영화를 사랑하는 법을 눈뜨게 하고, 그에게 베푼 사랑만큼이나 큰 아픔을 주는 인물이다. 한없이 자유분방한 영혼 미치를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는 스필버그 감독이 자신의 어머니를 연기할 인물로 일찍이 점찍어 둔 배우다. 출연 장면마다 인상적인 방점을 만든 윌리엄스는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인상적 활약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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