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나는 ‘댓글 폭력’에 책임이 없나?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kjm@jbnu.ac.kr)
  • 승인 2023.03.24 17:05
  • 호수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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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은) 당내 좌표 찍기, 문자폭탄, 증오와 혐오의 언어들이 난무하고 보수·진보 진영 간 갈등이 나라를 분열시키는 상황에 걱정하고 계셨다.” 최근 민주당 의원 박용진이 문재인을 만난 직후 올린 페이스북 글이다. 반가운 말씀이다. 아니 두 분 모두 고맙다. 증오와 혐오의 언어들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꼭 듣고 싶은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6년 전 문자폭탄과 악플에 대해 “뭐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들”이며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었다고 했다. 그가 그 발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을 더했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뒤늦게라도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걸 시사해준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악플로 대변되는 증오와 혐오의 언어에 대해선 내로남불이라는 이중 기준이 작동한다. 그런 언어가 나의 반대편을 향하면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나 또는 내 편을 향하면 견디기 어려운 폭력이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악플의 피해자들을 보호하려는 제도적 조치를 취하려고 하면 이에 대해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선량한 사람들의 주요 논거가 ‘표현의 자유’라는 것도 흥미롭다. 아니 웃긴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과장하는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fallacy of slippery slope)’를 범하는 것도 우습지만, 한국보다 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들에서 그에 못지않게 심각하게 여기는 명예훼손과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해선 무관심한 게 말이다.

과거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독재정권은 사라졌지만, 그 쓰라린 기억과 경험은 아직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 덕분에 한국은 증오·혐오 언어 표현이 자유로운 정도에서 세계 최상위권에 속한다. ‘악플 테러’로 인한 연예인·유명 인사의 극단적 선택이 십여 년째 지속돼 오고 있음에도 한국 사회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둔감하다. 하기야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증오·혐오 언어가 극단을 치닫고 있으니 무얼 기대할 수 있으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강철 같은 멘털’로 무장하는 각자도생의 길뿐이다.

평소 그런 답답함을 느껴 오던 나에게 언론인 정지혜가 최근 출간한 《우리 모두 댓글 폭력의 공범이다: 악플러의 탄생과 디지털 공론장 붕괴의 드라마》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극소수 악플러를 넘어서 사실상 우리 사회가 그들의 ‘공범’임을 입증하면서 질타한 게 인상적이다. 저자는 악플러와 언론은 서로를 먹여 살리는 공생관계가 되었으며, 댓글 폭력을 민생 차원에서 다뤄야 할 정치권은 폭력 자체엔 눈을 감으면서 정치적 유불리에만 혈안이 돼있으며, 일반 소비자들은 댓글 폭력을 오락 상품으로 소비하면서 사실상 그걸 ‘정상화’ 해줌으로써 지속시키는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이런 댓글 폭력에 대해 점잖은 사람들은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고 공감하자”는 해법을 제시하지만, 저자는 “자기 집단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연결의식”에 근거한 “공감이 오히려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역설”에 주목한다. 문제가 되는 건 “공감 능력 부족”이 아니라 “자신이 친밀하게 느끼는 이들에게 편향된 과도한 공감”이라는 것이다. 비분강개 정서를 앞세운 댓글 폭력은 바로 그런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름 정의로운 생각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정녕 ‘댓글 폭력’에 책임이 없는가?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준엄한 질문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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