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이수만’ 시대 시험대 오른 에스파의 승부수
  • 김영대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5.20 11:05
  • 호수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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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혁신 혹은 계승?
에스파의 차별성은 그래도 SM의 DNA

에스파는 최근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4세대 여자 아이돌그룹 중에서도 가장 먼저 주목받은 팀이다. 아이돌 제작에 가장 풍부한 경험을 보유한 SM이 공들여 내놓은 새 걸그룹이라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국내 최초의 메타버스 걸그룹이라는 신박한 콘셉트, 거기에 ‘광야’ ‘아이’ ‘싱크’ 같은 낯선 단어들을 앞세운 세계관의 여러 요소가 빼곡히 더해져 그룹에 신비로운 이미지를 불어넣은 것이 주효했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real함을 내세운 에스파의 new world

당연히 의도된 것이겠지만 마치 가상의 인간을 보는 것 같은 차가움과 세련미를 겸비한 멤버들의 외모, 종종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독특한 음색과 창법 역시 한몫을 담당했다. 물론 이들이 단지 낯선 이미지나 콘셉트만으로 이 치열한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에스파가 K팝 시장에 연착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히트곡 《Next Level》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곡은 SM 레트로라 명명할 수 있을 만큼 이들이 그간 들려준 사운드적 미학의 종합 완결판 같은 느낌을 준다.

비록 취향을 탈지언정 다른 어느 기획사도 아닌 SM만이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는 독창적인 미학, 이수만-유영진이 완성해낸 그들만의 음악적·비주얼적 방법론의 최신 증보판이 바로 에스파였던 것이다. 이것이 통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이수만이 SM을 통해 숙성시키고 이제 한 세대를 거쳐 대중에게도 익숙해진 어떤 미학적 요소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수만이 빠진 에스파의 새 음악은 단순히 에스파의 신곡일 뿐만 아니라 ‘포스트 이수만’ 국면에서 SM이 어떤 새로운 미학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느냐에 대한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변화의 조짐은 앨범 표지에서부터 분명하게 포착된다. 블랙맘바와 대적했던 광야가 아니라 언뜻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에스파다. 가상의 세계와 대칭점에 있는 ‘real world’를 표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real의 의미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에게 던진 모피어스의 질문처럼 어떤 것을 ‘진짜’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와 결부될 수밖에 없기에 다소 모호하면서 이중적으로 느껴진다. 이 모호함의 뉘앙스를 잘 보여주는 트랙이 바로 선공개 곡이자 오프닝 곡인 《Welcome To MY World》다. 현실로 초대하는 곡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몽환적인 사운드를 담은 이 곡은 이번 앨범의 사운드적 방향성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질 것임을 예고하는 트랙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두 곡, 타이틀곡  《Spicy》와 《Salty & Sweet》은 두 가지 다른 의미에서 에스파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언뜻 비슷한 결을 가진 이 두 곡은 전반적인 사운드 디자인과 디테일에서 분명히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다. 우선 《Salty & Sweet》은 에스파의 기존 음악들에 익숙하거나 최근 몇 년간 SM의 시그니처 사운드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를테면 반응이 ‘보장된’ 곡이다.

하지만 이 곡을 굳이 타이틀곡으로 삼아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번 앨범을 통한 SM의 의도가 읽힌다. 타이틀곡 《Spicy》는 기본적으로 소녀시대부터 이어지는 SM의 사운드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에스파가 기존에 내놓았던 곡들에 비해 구성이 훨씬 심플하고 사운드의 마무리도 경쾌하다.

도입부에 흐르는 1990년대 스타일의 드럼 사운드는 최근 레트로 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데다, 시원스러운 랩 벌스와 묘하게 중독적인 프리-코러스의 멜로디 역시 세련되고 산뜻하다. 요즘 다시 유행하는 미국 스타일 밀레니얼 하이틴 룩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뮤직비디오와 함께 들으면 그 매력은 배가된다. 광야의 전사에서 느껴졌던 일말의 인공적인 어색함 역시 찾아볼 수 없다.

‘Welcome To MY World’ 앨범의 다른 수록 곡들에서도 변화와 일관성이 느껴진다. 심플하고 세련된 R&B 편곡과 잔잔한 후크가 인상적인 《Thirsty》, 최소한의 구성만으로 평범한 듯 무난하게 보컬을 전개해 나가는 《I’m Unhappy》에서도 공히 확인되지만 이 앨범은 약간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의식적인 ‘한 방’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결하고, 쉽고, 호감을 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운드들의 조합이 에스파가 초대하는 새로운 세계의 핵심이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서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자 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Til We Meet Again》을 통한 마무리가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이돌 앨범에 빠지지 않는 팬 송이기 때문에 서사적으로 특별히 더 독특할 건 없지만 종종 관습적으로 맨 마지막에 배치되는 소위 ‘소셜미디어 팝’류의 지극히 평이한 사운드에 비한다면 에스파의 팬 송은 조금 더 세련되고 풍성한 느낌을 준다. 수록 곡의 퀄리티에서만큼은 그 어떤 레이블보다도 양질의 곡들을 보유하고 있는 SM의 노하우 혹은 뚝심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여전히 SM스럽지만 청량하고 간결해진 에스파

에스파의 새 앨범은 포스트 이수만 시대 SM이 내놓은 새로운 청사진일까? 아직 단언하기엔 이르다. 따지고 보면 이 앨범에서 지난 20여 년간 SM이 시도하지 않았거나 들려주지 않았던 음악들이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새로움과 익숙함 중 하나를 고르라면 여전히 익숙함이 이 앨범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주된 키워드일 것이다.

이 앨범에서 느껴지는 변화는 근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밀레니얼 레트로, 심플함과 따뜻함에 대한 대중의 선호, 숏폼과 스페드 업 버전의 유행 등 새로운 음악 시장의 전략에서 내놓은 타협적 대응책에 가깝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메타버스나 세계관의 성장이 엔데믹 시대를 맞이하며 주춤하기 시작한 와중에 내린 어쩔 수 없는 방향 선회일 수도 있다.

물론 ‘맥시멀리즘’ K팝에 대한 반동으로 최근 불기 시작한 ‘이지 리스닝’ K팝의 영향을 일부 받아들인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이러다가 보란 듯이 다시 광야의 전사로 돌아가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에스파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해도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SM이 겪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 앞에서 새로운 방향에 대한 고민이 일정 부분 느껴진다는 것이고, 그 와중에 에스파의 개성, SM의 시그니처 사운드, 팬들과 대중이 에스파에게 원하는 모습 간의 조화로운 지점을 찾아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뉴아르’라고도 이름 붙여진 후발주자 걸그룹들. 그러니까 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과의 치열한 4세대 경쟁에서 에스파가 보여줄 수 있는 음악적·이미지적인 차별점을 확인시켰다는 것만으로 일단 이 앨범은 의미 있는 성공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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