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다양성 확보’ 힘썼지만 ‘서사 확장’에는 게을렀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5.28 13:05
  • 호수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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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논란 뚫고 당도한 영화
의도 좋지만 작품 자체의 매력은 아쉬워

인터넷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30여 년 만에 실사화되는 《인어공주》 에리얼에 흑인 가수 겸 배우 할리 베일리가 낙점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뿔난 여론이 디즈니 홈페이지를 태울 기세로 타올랐다. 캐스팅에 대한 저항감은 #NotMyAriel(나의 에리얼은 이렇지 않아)이라는 해시태그 달기로까지 번졌다. 팬들은 디즈니가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강박 때문에 원작을 변질시키고 있다고 여겼다. 《인어공주》(1989)에 대한 추억이 훼손된다고 우려했다.

영화 《인어공주》 스틸컷 및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인어공주》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PC를 동반한 캐스팅 잡음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흑인 배우 리샤나 린치가 《007 노 타임 투 다이》(2001)에서 더블오(OO) 살인 면허를 부여받는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다이엘 크레이크가 떠난 후 007 자리는 아직 공석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 주인공을 여성과 흑인이 맡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와 비슷한 목소리가 나왔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정치적 올바름을 바라보는 의견 차이도 그만큼 컸다.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배우 개인을 향한 거친 비판은 경계하면서도 이런 선택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두고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단언하는 것도 일견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다는 게 나의 견해다. 팬덤이 두텁거나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일수록 캐스팅 논란에는 실과 바늘 같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역대 최장기간 제임스 본드를 역임하며 사랑받은 대니얼 크레이그 역시 ‘기존 007과 달리 금발에 파란 눈’을 가졌다는 이유로 처음 캐스팅됐을 땐 엄청난 저격을 받았다. 《뮬란》 역시 처음 실사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화이트 워싱’(원작 캐릭터의 인종을 백인으로 바꾸는 것) 우려에 몸살을 앓았다. 알다시피, 이 우려는 동양인 유역비가 최종 캐스팅되면서 잦아들었다.

캐릭터가 흑인이어서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결사 반대를 부르짖는 이들과 원작과의 싱크로율에 관심이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 평가하는 건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처럼 그 콘텐츠를 보고 자란 팬들이 존재하는 작품의 감상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추억’이다. 기억 어딘가에 봉인돼 있던 노스탤지어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력을 발휘하려 들기에 이는 영화의 명(明)이 될 수도, 반대로 암(暗)이 될 수도 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일 수 있지만, 결국 논란을 돌파해낼 수 있는 확실한 하나는 작품의 재미다. 그렇다면 논란을 뚫고 당도한 《인어공주》는 어떨까.

영화 《인어공주》 스틸컷 및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인어공주》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디즈니의 의지

흑인 인어공주에 대한 잡음이 일자 ‘불쌍하고 불행한 영혼들을 위한 공개 편지’라는 글을 통해 반박하기도 했던 디즈니가 이 사안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상한 것 이상으로 견고하다. 《인어공주》에서 인종이 바뀐 건 에리얼만이 아니다. 일단 에리얼의 언니들이 그렇다. 디즈니는 월드컵이 개최지를 대륙별로 할당하듯, 백인·흑인·동양인·아랍인 등으로 인어 자매들을 구성했다.

에릭 왕자(조나 하우어 킹)가 속한 인간 세계도 시대성을 고려해 업데이트했다. 이 세계의 통치자는 흑인 여왕이다. 그렇다면 하얀 피부색의 아들 에릭 왕자는 혼혈인 건가. 그건 또 아니다. 에릭은 입양된 자식이다. 여성의 인권을 챙기는 동시에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구성을 타파하는 설정인 셈이다. 주요 인물뿐 아니라, 조연 목소리와 엑스트라까지 인종을 고려해 배치했다. 반목하던 인간 세계와 인어 세계의 화합까지 챙기려는 순간에 이르면 뭐랄까, 영화가 성별·인종·문화·종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주 대통합의 뜻을 품었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2023년판 《인어공주》는 다양성 바람을 선도하는 ‘프런트 러너’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점하겠다는 디즈니의 노선을 다시금 천명하는 작품이다. 백인 우월주의 가치관을 주입한 주범으로 평가받아온 디즈니는 200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의 오류를 하나둘 수정해 왔다. 《인어공주》와 함께 디즈니의 황금기를 이끈 《알라딘》과 《미녀와 야수》가 실사화 과정에서 진취적인 여성으로 탈바꿈했고, 《토이스토리》 초창기 양치기 소녀 정도에 머물렀던 도자기 인형 보핍은 《토이스토리 4》(2019)에선 주인공 우디를 모험으로 이끄는 당찬 인물로 거듭나기도 했다.

이번 실사화를 통해 《인어공주》를 처음 접한 새로운 어린 관객의 시선은, 백인들이 주요 캐릭터를 장악한 TV를 보고 자란 세대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공주를 떠올릴 때 ‘흰 피부’가 고정값으로 따라붙진 않을 테니 말이다. 2023년판 《인어공주》는 미디어가 알게 모르게 심어온 고정관념과 편견을 갱신한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영화 《인어공주》 스틸컷 및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인어공주》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원작과 차별화된 독창성 부족해

그렇다면 《인어공주》는 성공한 리메이크인 걸까. 이에 대해선 흔쾌히 긍정하기 망설여진다. 다인종 끌어안기란 의미를 빼면 리메이크로서 (영화 자체의 매력은) 다소 심심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피부색만 바꿨을 뿐, 원작과 차별화되는 그만의 독창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인종의 다양성 확충’에 힘을 쏟은 것과 비교하면 ‘서사 확장’에는 게으른 면도 있다. 시대적 감수성에 뒤처지는 가사 일부가 수정되고 새로운 노래 3곡이 새롭게 추가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원작을 독창적으로 변주했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시카고》(2003), 《메리 포핀스 리턴즈》(2019)를 연출하며 뮤지컬 장르에서 잔뼈가 굵은 행보를 보여온 롭 마샬의 솜씨치고는 군무 신들 역시 그리 인상적이지 못하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언더 더 시(Under the Sea)’를 실사 버전으로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원작의 가슴 벅찼던 감흥을 떠올리면, 그 위력이 다소 떨어진다. 또 하나 걸리는 건 CG 기술력이다. 분명 만화 속 세계를 사실감 넘치게 구현하긴 했다. 그러나 《아바타: 물의 길》(2022)의 황홀경 가득한 수중 신으로 눈높이가 부쩍 높아진 탓인지 감흥이 크게 다가오진 않는다.

반대로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보는 듯 현실감 있게 새옷을 입은 세바스찬(게), 플라운더(물고기), 스커틀(갈매기)은 《라이온 킹》(2019)의 오류(?)를 되풀이한다. “만화가 지니는 특징, 흔히 ‘만화적’이라 불리는 극대화된 감정 표현이 사라지면서 캐릭터의 개성과 감성이 전반적으로 밋밋해졌다.” 《라이온 킹》 때 썼던 문장인데, 이 문장은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대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논란의 중심에 섰던 할리 베일리는 영화 안에서 어떠한가. 그녀의 노래는 훌륭하다. “(오디션 당시) 할리 베일리의 노래가 끝날 때쯤 나는 울고 있었다. 그 후로도 많은 배우를 더 봤지만, 그가 세워놓은 높은 기준을 넘는 사람은 없었다”는 감독의 말은 단순 립서비스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 135분 가까운 극을 끌고 가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단조로운 연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관객의 시선이 아닌 마음을 흔들어야 하는 구간들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더 아쉬웠던 건, 에리얼의 아빠이자 아틀란티카 바다의 왕을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 바다 밖에서 살벌한 연기를 보여온 이 배우는 자신의 ‘찐’ 연기를 보여줄 만한 신을 부여받지 못한 인상이다. 부성애가 중요하게 작동하는 영화 안에서 내내 뜬금없이 등장했다 뜬금없이 퇴장한다. 이 와중에 마녀 울슐라를 연기한 멜리사 맥카시가 극의 허파 같은 존재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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