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마른다” 초유의 답안지 파쇄…분노한 응시생들 ‘집단소송’ 간다
  • 이혜영 기자 (zero@sisajournal.com)
  • 승인 2023.05.25 20: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해자들 “인생 걸렸는데 선심 쓰듯 재시험 기회 제공?” 성토
집단소송 예고에 법정 공방 불가피…고용노동부 특별감사 착수
어수봉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왼쪽 네번째)과 임직원들이 5월2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지난달 23일 서울 은평구 연서중학교에서 시행된 '2023년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 답안지 파쇄사고와 관련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수봉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왼쪽 네번째)과 임직원들이 5월2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지난달 23일 서울 은평구 연서중학교에서 시행된 '2023년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 답안지 파쇄사고와 관련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상 초유의 국가자격시험 답안지 파쇄 사태를 둘러싼 후폭풍이 거세다.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의 총체적 난맥상을 드러낸 이번 사안은 피해를 입은 응시생들이 집단소송을 준비하면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시험 종료 한달이 지난 시점에 '재시험' 날벼락을 받아든 응시생들은 어떤 보상으로도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기 어렵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산업인력공단이 지난달 23일 실시한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에서 필답형 답안지가 파쇄 처리된 피해자들이 본격적인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복수의 로펌이 소송 참가자를 모집 중인 가운데 응시생들은 오픈 채팅방을 통해 집단 소송 정보를 공유하며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피해 응시생들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예현 측은 오는 26일 오후 5시까지 소송인단을 모집한 뒤 서울서부지법에 공단을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법률 대리인단은 공단 측이 책임을 인정한 데다 과실이 명확하게 드러난 사안인 만큼 배상 책임 판결을 이끌어 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피해자들은 공단을 상대로 정신적·물질적 피해 등에 대한 보상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한 피해 복구는 불가능하다며 장탄식을 쏟아낸다.   

한 피해 응시생은 "다시 공부하느라 피가 마른다"며 "다 끝났다 생각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오른다. 가채점은 합격이었는데 재시험에서 떨어지면 그땐 누가 책임지느냐"고 성토했다. 

또 다른 응시생도 "(공단이) 재시험 날짜를 일방적으로 정한 뒤 기억력을 복원하라고 한다"며 "수험생들은 시간을 다시 투자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 자체로 이미 피해 복원이 힘들다. 누군가에겐 인생이 걸린 일인데 마치 선심 쓰듯 '재시험 기회 제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고 거세게 질타했다. 

시험 종료 후 한 달이나 지난 시점에 답안지 파쇄 통보를 받은 응시생들은 최소 일주일 내로 재시험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가채점 이후 합격 안정권임을 확인한 피해자들의 경우 이미 교재나 자료를 정리한 경우도 있어 막막하다는 반응이 쏟아진다. 

전기산업기사 시험을 준비했던 한 응시생은 "손 떨리고, 화 나고, 너무 억울하다"며 "하나라도 더 쓰려 손이 부서져라 시험을 봤는데, 답안지가 파쇄됐으니 재시험을 보라고 하는 상황이 말이 되나. 그러고 어떻게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는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수봉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이 5월2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지난달 23일 서울 은평구 연수중학교에서 시행된 '2023년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 답안지 파쇄 사고와 관련한 사과문 발표를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어수봉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이 5월2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지난달 23일 서울 은평구 연수중학교에서 시행된 '2023년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 답안지 파쇄 사고와 관련한 사과문 발표를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609명의 답안지를 파쇄해버린 공단의 후속 대응과 안내도 문제 투성이라는 반응이 이어진다. 공단에 개별 문의하면 '논의 중이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겠다' '재시험을 봐 달라' 등 앵무새 답변만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답안지 파쇄 관련 진상조사를 포함한 전반적인 점검을 위해 산업인력공단에 대한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공단은 지난해 세무사 시험을 비롯해 수 차례 공정성 논란에 휩싸였고, 초유의 답안지 폐쇄 사태로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이다. 여기에 국민권익위원회가 중앙행정심판위원회를 열고 지난 2월 실시한 변리사 1차 시험 '산업재산권법'에 출시된 15번 문제를 '정답 없음'으로 결정하며 공단의 국가자격시험 관리에 전반적인 구멍이 뚫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어수봉 공단 이사장의 사퇴를 압박하고 있다.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2023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황당한 무능이, 그것도 국가자격시험에서 일어났다"며 "국가기술자격 시행 과정 전반에 대한 점검은 당연하거니와 무능과 몰염치로 일관한 어 이사장은 즉각 사퇴하라"고 비판했다.

한편, 공단은 지난달 23일 서울 은평구 연서중학교에서 시행된 정기 기사·산업기사 실기시험 필답형 답안지 609건이 채점 전 파쇄됐다고 밝혔다. 시험 종료 후 연서중 답안지는 포대에 봉인돼 관할인 서울서부지사로 운반됐고, 지사 금고에 보관됐다. 이튿날인 24일 서부지사 관할 16개 시험장에서 나온 답안지 포대 18개를 모두 공단 본부 채점센터로  보내야 했지만, 직원 인수·인계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고 연서중 포대 1개는 잔여 문제지로 분류돼 파쇄됐다. 공단 측은 답안지 포대가 누락되고 파쇄된 사실을 파악조차 하지 못하다 채점을 시작한 이달 20일에서야 이를 인지했다.

공단 측은 "피해 응시생들의 손해가 최대한 복구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되도록 내달 1∼4일 시험에 응시해 당초 예정된 합격자 발표일(6월9일)에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다"고 답했다. 공단은 609명에게 교통비 등을 지원하고, 추가 보상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