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인터뷰] “한일 정상 위령비 참배, ‘브란트 모멘트’ 같은 ‘윤석열-기시다’ 모멘트”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3.05.29 07:35
  • 호수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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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수교 60주년 2025년에 ‘엘리제 조약’식 포괄적 협력방안 검토될 수도”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그 합의가 뒤집히고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지켜봤고, 윤석열 정부에서 새로운 해법이 제시되고 양국 관계가 복원되는 것 역시 보고 있다. 그때마다 국내 여론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수많은 국가 의제 중 한일 관계만큼 복잡한 난제도 드물다. 윤 전 장관에게 일본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물었다.

ⓒ시사저널 이종현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시사저널 이종현

윤석열 대통령이 제시한 강제징용 해법은 어떻게 평가하나. 

“윤 대통령이 지난 3월 강제징용 해법에 대해 ‘1965년 국교 정상화 당시의 합의와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안’이라고 강조했는데, 논리적이고 솔직한 설명이라고 본다. 지난 정부가 임기 중 아무런 진전도 만들어 놓지 못한 상태에서 새 정부가 모든 부담을 이어받은 후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한 끝에 이뤄낸 결단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향후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이 있을 수 있다고 보나.

“정부는 물컵의 절반을 먼저 채웠고, 일본이 나머지 절반을 채우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5월초 기시다 총리의 방한 당시 개인적 소회 발표에서 보듯 지난 2개월간의 진전 상황은 그런 희망이 조금씩 현실화될 가능성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국내정치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내린 담대한 결단이 한일 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한·미·일 협력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외교의 큰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딜레마적 성격의 한일 과거사 문제를 접근하는 데 있어 ‘불가능한 최선’보다 ‘가능한 차선’을 찾으라는 원로 전문가들의 조언과도 부합한다.”

한일 정상이 일본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처음 참배했다.

“흔히 국제정치에서 1957년 구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따른 충격을 ‘스푸트니크 모멘트’로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 후 과거사 반성과 관련해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폴란드 방문 당시 바르샤바 게토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으며 절한 것을 ‘브란트 모멘트’라고 부르곤 한다. 이번 위령비 공동참배도 같은 맥락에서 ‘윤석열-기시다 모멘트’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민들이 일본 지도자들로부터 보고 싶은 게 바로 이런 인간적 감성적인 모습이다.”

방한 당시 기시다 총리의 ‘가슴 아프다’는 발언은 어떻게 봤나. 

“기시다 총리의 표현이 피해자들 입장에선, 또 독일 지도자들이 반성하는 방식에 비해서는 미흡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국내에 상당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6년 이후 일본 정부가 취해온 입장에 비춰보면 기시다 총리가 새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신뢰를 갖게 돼 개인적 결단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위령비 공동 참배와 더불어 그 함의가 적지 않다. 이처럼 서로 가슴을 여는 언행이 조금씩 쌓이게 되면 막혔던 물꼬가 트이고, 손뼉을 마주치는 선순환 외교로 갈 수 있을 것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현 총리인 기시다 당시 외무상이 파트너였다. 

“기시다 당시 외무상과는 연간 6~7회 이상 만났다. 위안부 협상 자체보다는 북핵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양자, 지역, 글로벌 문제에 관해 서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고뇌했다. 합리적이고 이야기가 통하는 파트너와 4년3개월을 동고동락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인복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2015년 수교 50주년을 계기로 도쿄를 방문했을 때 만찬을 하며 한일 관계 장래에 관해 솔직한 대화를 했는데 오늘 양국 관계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는 상황을 보니 당시 기억이 상기되면서 감회가 새롭다.”

문재인 정부에서 위안부 합의가 뒤집혔다. 당시의 결정은 어떻게 평가하나.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형해화시킨 결과 한일 관계는 보복과 맞보복의 악순환을 거치면서 1965년 수교 이후 최악의 상태로 악화됐다. 정부 간은 물론 사실상 거의 모든 부문에서 대화와 교류가 단절되는 전례 없는 신뢰 제로 상태였다. 위안부 합의는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당시 부통령을 포함해 미 행정부가 우리 입장을 막후 지원한 가운데 타결된 것인데 합의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나오면서 한미 동맹은 물론 한·미·일 협력도 상당 기간 타격을 입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문 전 대통령과 면담도 했다.

“문재인 정부 측에는 위안부 합의가 정권의 이해 차원에서 접근한 게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들과 국익을 위해 과거 어느 때보다 피해자들의 요구와 우리 입장을 최대한 반영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차선책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피해자 할머니와 유족들의 약 4분의 3에 해당하는 다수가 찬성하고 고마워했다는 점, 당시 아베 총리도 결단을 내리기 직전까지 유보적이었다는 점, 미국이 우리를 적극 지원한 점 등을 공유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 정부가 합의를 파기할 경우 엄청난 후과가 예상되므로 국내적으로 부담이 있으면 지난 정부에 책임을 돌리고 국제적 합의는 유지하되, 꼭 필요하다면 협상 내용의 본질과는 별도로 할머니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더 풀어줄 수 있는 감성적 조치를 추가로 협의해볼 수는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했다.”

결과적으로 조언대로는 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2015년 양국 정부 간 위안부 문제 합의가 공식 합의였다는 점은 인정한다’고 해놓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 강제징용 판결에 따라 ‘강제집행 방식으로 현금화시키는 것은 한일 관계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면서 아무런 해법도 만들지 못했다. 이는 마치 의사가 마지못해 진단을 해놓고 약 처방은 다른 의사에게 가서 받으라는 격이었다. 국내정치적으로는 크게 득을 보았겠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놓으면 국익과 외교 관계에 얼마나 큰 손실과 악순환이 오는지, 그리고 다음 정부에 얼마나 큰 부담을 주는지 잘 보여준 반면교사 사례라고 본다.”

앞으로 한일 관계는 어떻게 전망하나.

“지난 3월과 5월 초 한일 양국 정상 간 교환방문을 통해 그간 과거사 문제로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있던 한일 관계가 드디어 터널 밖으로 나왔다. 관계 개선이 계속 진전되어 나가면 시너지 효과가 커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2025년 수교 60주년에 맞춰 독일과 프랑스 간 ‘엘리제 조약(화해협력조약)’과 유사한 포괄적 협력방안도 검토될 것으로 본다. 물론 이런 정상화 과정에서 많은 어려운 장애물이 나올 것이다. 특히 양국 모두 국내적으로 정파적 차원이 아닌 국익 차원에서 얼마나 순조롭게 의견을 수렴해 나갈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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