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美·中의 반도체 러브콜…결국 美 택하나
  • 허인회 기자 (underdog@sisajournal.com)
  • 승인 2023.05.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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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장관 회담 직후 中 “반도체 공급망 강화 동의”
산업부는 “핵심 원자재·부품 수급 안정화 지원 요청”
엇갈린 입장 속 韓기업만 좌불안석…최악은 제재?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26일(현지시간) 미국 디트로이트 WBC호텔에서 왕 원타오(Wang Wentao) 중국 상무부 부장과 면담을 하며 악수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26일(현지시간) 미국 디트로이트 WBC호텔에서 왕 원타오(Wang Wentao) 중국 상무부 부장과 면담을 하며 악수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한국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구애가 격화되고 있다. 중국의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제재 이후 그 빈자리를 놓고 양국이 옥신각신하고 있어서다. 현재로서는 미국 편에 설 가능성이 커져가고 있다는 관측이다. 한국 정부가 우리 기업에 마이크론의 점유율을 차지하도록 장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중국 정부가 한국 기업 제재에 나설 경우 그 타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 정부를 향해 ‘불장난’ 등의 험한 말을 쏟아냈던 중국이 한국 기업에 유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마이크론 제재로 인한 반도체 부족을 한국 기업을 통해 채우려는 의도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 장관회의에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 부장은 양자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중국 측은 한국 측에 반도체 공급망 문제에서 대화와 협력을 제안했다.

무역장관 회의 직후 중국 상무부는 “양측은 반도체 산업망과 공급망 영역에서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고 밝혔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은 “양국 정상의 전략적 지도 아래 중·한 경제·무역 관계가 심화·발전했다”며 “중국의 수준 높은 대외 개방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한국과 함께 양자 무역 및 투자 협력을 심화하는 것을 비롯해 산업망과 공급망 안정을 수호하길 원한다”며 “양측은 반도체 산업망과 공급망 영역에서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 상무부는 보도문 형태를 통해 회담 결과를 즉각 발표하며 양국의 협력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입장을 미묘하게 엇갈렸다. 산업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상호존중을 기반으로 양국 경제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며 “중국 측에 교역 원활화와 핵심 원자재·부품 수급 안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으며, 중국 내 우리 투자기업들의 예측 가능한 사업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협조를 당부했다”고 알렸다. 원론적 수준의 협력 논의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반도체’ 문구는 언급되지 않았다.

특히 중국 상무부와의 면담 내용은 보도자료의 한 단락에 불과했다.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의 면담을 비롯해 메리 응 캐나다 국제통상장관, 클라우디아 산우에사 칠레 국제경제차관과의 협의 내용이 함께 포함된 보도자료였다.

우리 정부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한국 반도체를 둘러싸고 미·중 간의 줄다리기가 갈수록 격해지고 있어서다. 그 시작은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였다. 지난 21일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산하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CAC)은 “마이크론 제품에서 비교적 심각한 보안 문제가 있다”며 “중요한 정보 시설 운영자는 마이크론 제품 구매를 중지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에 대한 반격이었다.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버지니아주 머내서스 공장 입구 모습 ⓒAP=연합뉴스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버지니아주 머내서스 공장 입구 모습 ⓒAP=연합뉴스

“中에 반도체 공급 안돼” 美 요구에 韓 응할까

이런 가운데 한국 기업이 마이크론의 중국 점유율(약 11%)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라는 외신보도가 나왔다. 블룸버그는 지난 27일 “한국 정부는 자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에 마이크론이 중국에서 잃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도록 장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 배경에는 한국 기업이 미국 정부가 내주는 허가에 의존해 중국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의 영향력이 미칠 것이란 주장이다.

앞서 지난 4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이 미국 반도체 마이크론의 판매를 금지해 공급 부족이 발생해도 한국 반도체가 그 공백을 메우지 말라고 백악관이 한국 측에 요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한·미 동맹이 갈수록 결속되고 있는 가운데 현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 측에 무게 중심을 둘 것이라는 외신보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후폭풍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상무부와의 회담 이후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지난 29일 칼럼을 통해 “대(對)중국 반도체 공급을 늘리지 말라는 미국의 요구를 한국이 거절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러면서 “만약 한국이 그러한 간섭을 뿌리칠 수 없다면 경제적으로 심각한 결과에 직면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한국 기업 제재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반도체 한파 속 올해 적자 실적이 예상되고 있는 한국 기업에는 리스크가 한층 더 커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29일 발표한 ‘경제전망(5월) 핵심이슈2-우리나라 반도체 수요구조의 특징 및 시사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난해 수출금액 기준 중국에 수출된 반도체는 전체의 55%에 달한다. 중국 수출 비중이 감소했지만 상당한 규모의 수출이다. 미국으로 수출된 반도체는 전체 금액의 7%였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자국 내 소비해야 하는 반도체가 있기 때문에 한한령과 같은 규제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한국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반도체에 타격이 있을 경우 개별 기업은 물론 우리나라 무역 수지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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