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봉쇄 이어 이번에는 ‘톈안먼 봉쇄’에 나선 시진핑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6.10 10:05
  • 호수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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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톈안먼 사건에 관한 기록 일체 사라져 
경기 침체로 실직·취업난 심각…민심 동요 우려한 듯

6월4일 베이징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톈안먼(天安門) 광장과 그 주변의 경비는  평소보다 훨씬 삼엄했다. 중국 공안 당국은 이전까지 톈안먼과 광장에 들어가는 입구에 보안검색대를 설치해 관광객들의 소지품을 검사했다. 그러나 이날은 광장으로 향하는 길목부터 200~300m마다 무장경찰까지 배치해 모든 행인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했다. 심지어 대로를 오가는 자전거까지 세워 신분증을 검사했다. 이날이 바로 톈안먼 사건 34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6월3일 홍콩에서 열린 톈안먼 사태 34주년 기념식 전날 코즈웨이베이 지역에서 경찰관들이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AP 연합

민주화 요구 분출했던 1989년 6월의 사건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실용주의자 후야오방은 문화대혁명 시기 엄청난 고난을 겪었지만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에는 복직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1980년에는 개혁개방 이후 첫 총서기로 선출돼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고, 과감한 대외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그 덕분에 중국 경제는 고속성장을 달성했으나 부정부패와 인플레이션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1986년 12월 이에 대한 시정과 관료주의 폐해를 막기 위한 과감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후야오방은 전국 곳곳의 대학생들을 직접 만나 대화했다. 사실 후야오방도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당내 민주화와 권력 분립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행보는 공산당 보수파를 분노케 했다. 결국 1987년 1월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쫓아내고 또 다른 실용주의 관료 자오쯔양을 총서기로 발탁했다. 이렇게 권좌에서 쫓겨난 후야오방이 1989년 4월15일 돌연 심장마비로 죽자, 대학생과 시민들은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와 그를 추모했다.

광장의 군중은 갈수록 늘어났고, ‘반(反)관료주의’ ‘반부정부패’ ‘민주주의’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런 요구는 일반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그에 따라 톈안먼 광장에서의 시위는 5월 들어 규모가 더욱 커졌고 다양해졌다. 결국 위기를 느낀 덩샤오핑과 공산당 보수파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6월3일 밤 장갑차·탱크 등을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에 진입했고, 이튿날 아침까지 광장과 도심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렇듯 톈안먼 사건은 단순히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 시위를 넘어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이정표다. 개혁파의 상징이었던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촉발됐고, 당시 중국에 만연했던 공산당의 부정부패를 바로잡고자 했다. 따라서 톈안먼 사건의 의미를 잘 알았던 중국 당국은 그동안 톈안먼 광장을 철저히 관리해 왔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이 집권한 이후부터 그 강도는 더욱 세졌다. 톈안먼과 광장 주변에 보안검색대가 설치됐고 무장경찰이 수시로 총기를 휴대한 채 경비에 들어갔다. 과거에도 톈안먼 사건을 전후해 경비가 강화됐지만, 그것이 더욱 상시화·상설화됐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톈안먼 사건에 관한 일체의 기록이 사라졌다. 중국 포털사이트나 SNS에서 톈안먼 사건과 관련한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결과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뜬다. 현대사 관련 글에 톈안먼 사건과 관련한 단어나 묘사를 넣어 커뮤니티 사이트나 SNS에 올리면 바로 삭제된다. 톈안먼 사건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은 중국을 넘어 홍콩과 마카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020년 6월30일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이 시행되면서 도서관·서점 등에서 톈안먼 사건과 관련된 서적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홍콩 당국은 6월4일 톈안먼 사건 추모 촛불집회도 불허했다. 홍콩의 촛불집회는 1990년부터 시작돼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 해마다 빅토리아파크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2020년에는 당국이 코로나19 방역을 핑계로 촛불집회를 불허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홍콩 시민이 빅토리아파크에 모여 촛불을 들자 참가자들을 체포·기소했다. 2021년과 2022년에도 방역을 앞세워 빅토리아파크를 아예 봉쇄했다. 올해는 더 이상 방역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자, 당국은 “‘특별한 날’에 국가안보를 해치려는 자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베이징처럼 수천 명의 경찰을 빅토리아파크와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해 추모 집회를 막았다. 이 같은 현실은 중국의 또 다른 ‘특별행정구’인 마카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진핑의 성과 매섭게 평가할 날 올 수도

그렇다면 중국 당국은 왜 톈안먼 사건 지우기에 더 혈안이 되었을까? 그 해답을 얻으려면 지난해 11월말 도시 봉쇄에 반발해 중국 주요 도시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시위는 지난해 11월24일 신장위구르족자치구 우루무치시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일어나 10명이 죽고 9명이 부상당하면서 촉발됐다. 제로코로나 정책에 따른 도시 봉쇄로 인해 진화가 제때 못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코로나19 사태 이래 3년 동안 참아왔던 중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 과정에서는 “시진핑 하야” “공산당 타도” 등의 구호마저 등장했다.

톈안먼 사건 이래 처음으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전국적으로 일으킨 대규모 시위였기에 그 충격이 엄청나게 컸다. 특히 톈안먼 사건의 시작과 여러모로 유사했다. 따라서 중국 당국은 지난해 12월7일 엄격하게 지켜왔던 방역 통제 정책을 버리고 위드코로나로 전환했다. 그 후 대륙 전역에서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중국인들은 큰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도시 봉쇄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희생이 따르더라도 코로나19와의 공존을 택했다. 이렇듯 한 고비를 넘긴 중국 당국은 올해 3월 양회(兩會)를 개최해 시진핑 주석 3연임의 마지막 통과의례를 마쳤다.

과거 중국 지도부는 태자당(太子黨), 상하이방(上海幇), 공청단파(共靑團派) 등 여러 파벌이 공존하면서 서로 견제했다. 이런 사실은 모든 중국인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 지도부는 모두 시 주석에게 절대 충성하는 심복들로 채워져 있다. 비록 지난해 시위에서 “시진핑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가 나왔지만, 대다수 중국인은 시 주석의 3연임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강력한 지도자가 경제를 계속 성장시켜 자신들과 중국을 부유하게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 주석의 ‘중화민족 부흥’과 결부되면서 젊은 층의 ‘애국주의’로까지 분출됐었다.

하지만 3년 동안 엄격한 방역 정책이 지속되면서 경제는 침체됐고 실직·취업난은 심각해졌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감원에 나서면서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로 인해 청년실업률은 지난 2월 통계 집계 이래 처음으로 20%를 넘었고 4월에는 20.4%까지 기록했다. 게다가 7월에는 1158만 명의 대학 졸업생이 새로 쏟아져 나와 상황이 더 악화된다. 그에 반해 경기 지표인 5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전월에 이어 연속 하락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중국인들이 시 주석을 매섭게 평가할 날이 올 것이기에 당국은 톈안먼 사건과 같은 과거 사례 지우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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