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무명 선수들’이 U20 월드컵 4강 반란을 일으켰다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6.11 13:05
  • 호수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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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도, 스타도 없지만 팀이란 이름으로 가장 빛난 U20 대표팀
이승원·최석현·이영준 등 숨은 보석 발굴한 김은중 감독 지도력 빛나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승전보가 대한민국의 새벽을 깨웠다. 2023 FIFA(국제축구연맹)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김은중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U-20 대표팀이 4강에 올랐다. 기대는 없고, 우려만 가득했던 팀이 만든 깜짝 성과다. 4강 진출 후 흘린 김은중 감독의 눈물이 의미를 더했다. 그는 “아무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함께 믿고 이런 결과를 낸 선수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난 1년6개월 동안 김은중호의 항해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2021년 말 사령탑에 취임한 김 감독은 막막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2년간 연령별 대표팀 운영이 사실상 멈추며 유망주에 대한 관찰이 끊긴 상태였다. 1년 동안 K리그 B팀(2군 격)과 대학팀을 중심으로 어린 선수들을 힘겹게 발굴했다. 지난 3월 AFC(아시아축구연맹) U-20 아시안컵에선 주장 이승원의 부상과 준결승에서 만난 개최국 우즈베키스탄의 홈 텃세로 4강 진출에 그쳤다.

6월4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산티아고 델에스테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FIFA U-20 월드컵 8강전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에서 연장전 끝에 1대0으로 승리를 거둔 대표팀 선수들이 자축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개최지 변경’ 등 숱한 악재 딛고 일어서

당초 이번 U-20 월드컵은 인도네시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김 감독도 현지 답사를 마치고, 인도네시아 환경을 고려한 플랜을 짰다. 그런데 FIFA는 본선 조추첨을 사흘 앞두고 갑작스레 개최지 변경을 통보했다.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일부 지방정부와 과격단체가 본선에 진출한 이스라엘 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성명을 냈기 때문이다. 대회를 한 달여 앞두고 FIFA는 아르헨티나를 새 개최지로 발표했다. 한국으로서는 시차 적응부터 180도 바뀐 환경을 마주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개최로 아르헨티나는 숙박비가 3배 이상 치솟았다. 훈련시설도 부족했다. 김 감독이 낸 해결책은 시차가 같은 브라질 상파울루에 캠프를 차리는 것이었다. 마침 상파울루에는 조별리그를 치러야 하는 멘도사로 가는 직항로가 있었다. 상파울루에서 열흘간 머물며 두 차례의 연습경기를 통해 컨디션을  끌어올린 김은중호는 첫 경기 나흘 전 멘도사에 입성했다. 

이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개막에 임박해 들어간 게 신의 한 수였고 조별리그 첫 경기부터 결과로 나타났다. 유럽의 강호 프랑스를 2대1로 꺾었다. FIFA 주관 대회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던(1무5패) 한국이 거둔 쾌거였다. 2차전에서 온두라스, 3차전에서 감비아와 비기며 FIFA 주관 대회에서 처음으로 조별리그를 무패로 통과했다. 16강에서 에콰도르를 3대2로 꺾은 김은중호는 개최국 아르헨티나를 이기고 8강에 오른 나이지리아를 연장 접전 끝에 1대0으로 누르며 4강에 올랐다. 

4년 전 열린 폴란드 대회에서 한국은 월드컵 사상 최초로 결승까지 진출했다. 남자축구가 FIFA 주관 대회에서 거둔 최고의 성과다. 하지만 이때는 당시 세계 최고의 유망주 중 한 명이던 이강인(마요르카)이 있었다. 정정용 감독은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 패배 후 이강인의 압도적인 개인 능력을 중심으로 전술을 짰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결승에서 우크라이나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이강인은 만 18세임에도 골든볼(MVP)을 수상하며 대회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한국에는 이강인 같은 위상의 선수는 없다. 탈고교급 선수로 각광받은 배준호(대전 하나시티즌)나 이미 A매치에 데뷔해 골까지 넣은 강성진(FC서울), 유럽 클럽의 관심을 받는 ‘제2의 김민재’ 김지수(성남FC)가 있지만 세계적인 주목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숨은 경쟁력을 발휘하는 선수가 줄줄이 나타났다. FIFA도 “한국은 환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빛나는 재능의 선수가 많다”고 극찬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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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10년 차 김은중, 열정과 냉정의 리더십 발휘 

대표적인 선수가 미드필더 이승원(강원FC)이다. 이승원은 단국대 소속이던 작년 1월 김은중 감독 부임 후 U-20 대표팀의 첫 소집에 이름을 올리며 꾸준히 뽑혔다.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연령별 대표팀에 뽑힌 적이 없었다. 김 감독은 이승원의 탄탄한 기본기와 패싱력, 넓은 시야를 주목했다. 첫 소집부터 주장에 임명했다. 황인범을 롤모델로 삼는 이승원은 “공격 포인트보다 빌드업을 위한 패스를 잘 넣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8강전까지 그는 정확한 킥으로 세트피스로만 무려 4개의 도움을 올렸다.

필드플레이어 중 유일한 대학생인 최석현(단국대)은 김 감독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다. 신장이 178cm로 센터백으로서는 단신이지만 상대 공격수를 꽁꽁 묶었다. 원래는 측면 수비수지만 김 감독은 최석현의 빠른 발과 헤더 능력을 보고 장신 수비수 김지수의 파트너로 그를 택했다. 레슬링 선수를 연상케 하는 단단한 체구의 최석현은 공격 가담 능력도 빛났다. 엄청난 제공권을 살려 16강전과 8강전에서 모두 헤더 결승골을 터트렸다. 단국대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이승원의 킥을 이용해 이번 대회에서 골 넣는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 

대형 스트라이커 이영준(김천 상무)도 혜성같이 등장했다. 지난해 수원FC 소속으로 17경기에 나섰지만 총 출전시간은 485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U-20 대표팀에서의 입지는 달랐다. 김 감독은 192cm, 87kg의 큰 체구에도 연계 플레이와 드리블 돌파 능력을 지닌 이영준을 꾸준히 기용했다. 김은중호 출범 후 가장 많은 득점(20경기 10골)을 기록했다. 이번 대회에서 이영준은 프랑스와 에콰도르를 상대로 득점을 올렸다. 특히 에콰도르전 선제골 장면에선 침투, 볼 트래핑, 마무리의 완벽한 삼박자를 보여줬다.

이런 숨은 보석들을 찾아 하나로 묶은 것은 김은중 감독의 힘이다. 2014년 플레잉코치를 시작으로 지도 경력 10년 차를 맞은 그는 열정과 냉정의 조화가 빛나는 감독이다. 감독이 되기 전까지 8년 동안 벨기에 2부 리그의 투비즈 코치와 감독대행, 대한민국 23세 이하 대표팀 수석코치를 거치며 다양한 방식의 국제무대 생존법을 터득했다.

10년간 착실히 쌓은 경험의 힘은 컸다. 이번 대회 중 발생한 여러 변수를 확실히 통제했다. 특히 바이에른 뮌헨이 야심 차게 키우는 미드필더 이현주, U-20 아시안컵에서 팀 최다 득점을 올린 고려대 소속 공격수 성진영이 모두 부상으로 낙마했다. 대회 중에도 공격수 박승호가 발목 골절 부상으로 귀국해 활용 자원이 줄어들었다. 그런 위기조차 기회로 돌렸다. 이번 대회에서 김 감독은 철저한 역습 위주의 공격 패턴을 준비했다. 수비 불안을 지우기 위한 선택이었다. FIFA도 김은중호가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때의 완성도가 이번 대회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경기 운영도 유연했다. 상대를 확실히 분석해 압박 라인 형성을 허리에서 할지, 수비에서 설정할지 매 경기 달리 가져갔다. 가장 큰 마법은 세트피스 전략이었다. 4강 진출까지 5경기에서 한국은 8골을 기록했는데 그중 4골이 세트피스를 통해서였다. 팔색조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세트피스 플레이로 확실한 득점 루트를 확보했다. 1979년생인 김은중 감독은 리더십 면에서도 아들뻘 선수들과 막힘 없는 소통을 했다. 친근하게 다가가지만, 동시에 원칙을 지키는 것을 강조했다. 김은중 감독은 지도자로서 더 성공적인 챕터를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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