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언어유희, 그 뒤끝은 추할 뿐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6.12 08:05
  • 호수 175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리를 지나갈 때 길가에 내걸린 현수막을 자주, 유심히 보는 편이다. 세상에 아무 목적 없이 걸리는 현수막은 없다. 그렇게 그것들은 저마다 간절한 사연들을 들고 인적이 많은 대로변으로 모여든다. 때론 누군가를 급히 찾는다고 애타게 호소하는 글을 담고, 때론 관공서에서 주민들에 알릴 내용을 전하기도 한다. 개중에 가장 많이 눈에 띄는 현수막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적 문구를 담은 현수막이다. 정당들이 다투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그 사각 틀 안에 쏟아낸다. 정치적 의견을 밝히기도 하고, 현충일과 같은 기념일에 맞춰 시의에 따른 캘린더형 메시지를 발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다.

지금은 철거돼 없지만 한때 같은 정당이 만든 동일한 내용의 현수막이 한 동네에서 거의 100m도 안 되는 간격으로 네 개나 걸린 적도 있다. 흰 천에 ‘윤석열 한미일 동맹 완성 환영, 검수완박 헌재 판결 OUT’이라고 적힌 현수막 하단에는 ‘자유통일당’이란 정당명이 쓰여 있었다. 전광훈 목사와 관련이 있다고만 알려졌을 뿐 대다수의 사람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자유통일당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는 ‘우리공화당’이나 ‘자유민주당’ 같은 소수정당의 명칭이 실린 현수막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거대 정당이라고 현수막 경쟁에서 비껴나 있지는 않다. 수효로만 따지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이름을 달고 내걸린 현수막이 훨씬 더 많아 보인다. 문제는 그 현수막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정책이나 비전을 알리는 내용이 아니라 경쟁 세력에 대한 비방 혹은 폄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현수막이 정당 간, 진영 간 싸움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코인 투자 의혹’에 싸인 김남국 전 민주당 의원의 사례를 꼬집어 ‘총체적 남국 민주당’이란 문구를 담은 현수막을 곳곳에 내걸어 제1야당을 공격하고,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문제를 지적하며 ‘독도가 일본땅?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이게 국익입니까?’라고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현수막에 ‘닥치고 공격’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힘이 누리호 발사 성공을 현 정부의 업적으로 부각하고자 내건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발사 성공, 우주시대 주인공 대한민국’이라는 글귀가 눈길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물론 정당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현수막이라는 손쉬운 도구를 앞세우는 행위를 마냥 비난하기는 어렵다. 정당이 자신들의 의견을 유권자에게 열심히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 채워지면 문제가 달라진다. 여기저기 난립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도 쉽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다. 국민이 진정으로 알고 싶은 내용은 없고 날 선 비방만 가득한 현수막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정치가 최근에 논란을 부른 ‘사실상 핵공유’ ‘심리적 G8’과 같은 정부 측 발언이나 현수막 속의 ‘촌철비방’ 같은 언어유희로 국민의 마음을 사거나, 이해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다. 오히려 현수막에서도 자신들의 잘못부터 먼저 반성하고,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에 대해 진정성 있게 알리는 쪽이 더 크게 환영받을 것이다. 섣부른 언어유희로 채워진 메시지는 정치의 뒤끝만 더 어지럽고 추하게 만들 뿐이다. 노골적인 비방이나 밑도 끝도 없는 자화자찬, 말장난만 넘치는 현수막은 그 자체로 이미 엄청난 공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