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여성’이 이제는 뉴노멀이다 [김동진의 다른 시선]
  •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6.18 14:05
  • 호수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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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
연약하고 유순한 여성의 모습 아닌 신체와 정신의 강인함 지닌 여성상 추구

신세계였다. 도끼로 장작을 패던 여자가 웃통을 벗어던지고 브라톱만 입은 상체로 다시 장작을 팬다. 특별한 자막이 없기에, 무언가에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나의 감상에 집중할 수 있다. 울퉁불퉁한 상체 근육을 드러내고 장작을 패는 여자가 멋있구나 하는. 또 한쪽에선 덩치 큰 여자가 무서운 기세로 장작을 팬다. 평범한 세상에서라면 무슨 여자가 저렇게 덩치가 크냐는 말이나 들었겠지만, 그 순간 그는 가장 안정적인 자세와 굳건한 정신으로 팀에 할당된 장작을 혼자서 다 패버리는, 가장 멋진 여자였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접한 이 신세계는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각 직종별 4명씩 군인, 경찰, 소방관, 운동선수, 경호원, 스턴트우먼들의 팀이 등장한다. 세트장이 설치된 섬에서 하는 경쟁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각 팀에는 숙소를 겸한 ‘기지’가 주어지는데, 상대팀 기지를 점령하면 승자가 되며, 진 팀은 탈락한다. 이 전투가 ‘기지전’이고, 아레나 세트장에서 하는 경쟁은 ‘아레나전’이다. 장작을 패는 경쟁은 아레나전의 일부였다. 

필자는 스물아홉 살에 미국 대학원에서 처음 여성학을 접한 이후 조금씩 더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강한 성별 고정관념을 그대로 재현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예능·광고 등이 어느 순간 불편해지기 시작해 지상파 방송이나 케이블 TV를 보지 않은 지 오래됐다. 다행히 OTT 플랫폼에서는 원하는 프로그램을 골라 시청할 수 있고 원치 않는 광고를 볼 일도 없기에, ‘그런 (성차별적인) 프로그램을 안 봐도 돼서 너무 속 편하다’고 주변에 말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성별 고정관념, 미디어 통해 재현·재생산

시대는 계속 변화하는데 젠더 관점으로 볼 때 TV 프로그램은 바뀌는 듯 바뀌지 않는 듯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어린 여자 아이돌은 모두 마르고 여리여리한 몸매이고, 그 몸을 최대한 많이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나와 춤을 춘다. 남성 아이돌이 추는 춤은 선이 굵고 강한 느낌을 주는, 그래서 소위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동작이 많다. 어느 예능이든 여성 출연자들은 완벽한 화장을 하고 예쁜 모습으로 나온다. 드라마의 서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연애관계에서든 일터에서든 여성을 연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너무도 미세하게 깔려 있어 페미니즘의 렌즈를 장착하지 않는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성별 고정관념은 우리의 일상에 널려 있고, 이는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고 재생산된다.

다행히 바뀌어가는 부분도 있어, 《노는 언니》 혹은 《골때리는 그녀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등장했고 시즌을 거듭하며 계속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이렌: 불의 섬》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다. 일단 출연자들의 구성 자체가 강인함을 보여준다. 군인, 경찰, 소방관, 운동선수, 경호원, 스턴트우먼 그 어느 것도 강인함에서 뒤지지 않는 직종이다. 특히 여성 소방관은 필자도 살면서 접한 적이 없으며, 소방관 중에 여성이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직종이다. 심지어 출연자들조차 “저 같은 사람이 또 있다고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하니, 남초 직장의 여성들이 자기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비가시화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여성들은 팀으로 모여 신나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한다. 특전사 출신 군인들은 이미 고도의 체력과 기술을 갖춘 데다 강한 승부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고자 한다. 흔히 여성에게 요구되는 ‘쿠션어’, 즉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심지어 협상을 하려고 찾아간 팀에서 협박이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과 매우 거리가 멀지만, 그렇기에 그 자체로 쾌감을 느끼게 한다. 소방팀에는 큰 키와 큰 덩치를 가진 팀원들이 뿜어내는 신체적인 힘이 있다. 전투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눈물을 보이는 여린 성격이지만, 불 끄기 경쟁에서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우승을 이끌어낸다. 유도, 씨름, 카바디(격투기·피구·술래잡기 등이 결합된 단체 투기종목), 클라이밍 분야의 전·현 국가대표로 구성된 운동팀은 쑥스러운 얼굴로 나와 엄청난 팔뚝으로 가뿐하게 팔씨름을 이기고, 음식이나 무기와 교환할 수 있는 칼로리를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항상 뛰어다닌다.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 포스터와 예고편 캡처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 예고편 캡처 ⓒ넷플릭스 제공

승부욕 넘치는 여성들의 게임, 화면 압도해

이뿐만 아니라 출연자 모두가 각 경쟁마다 최선을 다하며 보여주는 정신적 강인함도 있다. ‘우리가 다 죽여버리자’거나 ‘심리전에서 지면 안 돼’라고 말한다. 상대팀의 죽여버린다는 말에 기분 나빠하며 ‘닥치고 돌격’이라고 한다. 어느 팀을 공격할 것인지에 관한 회의에선 ‘센 놈이랑 붙자, 그게 멋있지’라고 하며, ‘아니, 우리를 누가 이기겠어’라는 자신감을 내뿜는다. 그리고 이런 출연자들의 말은 각 에피소드의 제목이 된다. 삶의 모든 장면에서 여성의 말은 자칫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기 쉬운데, 이 프로그램에는 이렇게 여성의 말이 전면에 등장한다. 

현실에서든 미디어에서든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일이다. 필자는 강의를 할 때 토의활동으로 학습자들에게 성별 고정관념과 관련한 질문을 종종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성(혹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들어야 했던 말들, 주위의 기대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다. 다양한 연령대 여성들 모두 공통인 것은 전통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틀에서 벗어난 경우 주변 사람들로부터 험한 말을 듣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무슨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냐, 네가 여자냐’ ‘여자가 쓸데없이 이렇게 키가 크냐’ ‘여자가 목소리가 왜 이렇게 크냐’ 같은 말들이다. 이런 말을 듣는 일상을 살다 보면 누구든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다. 힘이 세다는 이유로 주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힘을 쓰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더 이상 힘이 세지 않은 여성으로 자란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사이렌: 불의 섬》이 특히 여성 아동·청소년 및 성인에게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강인한 신체를 드러낸 여성들을 보는 여성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체를 강인하게 만들어 나가게 될 것이다. 약해서 보호받아야 하는 여성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한 여성이 되어갈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전우애를 잃지 않는 여성들을 TV에서 보는 것에 익숙해진 여성은 더 이상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성차별적 언어를 내재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승부욕 넘치는 여성들의 게임을 보고 자란 여성은 더 이상 남자 형제에게, 남자 동급생에게 양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성취하는 여성으로 자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연약하고 유순한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신체와 정신의 강인함을 지닌 여성상이 바로 여성으로서 추구해야 할 새로운 여성상, 뉴노멀이 될 것이다. 《사이렌》 시즌2인 ‘물의 섬’에서는 또 어떤 멋진 여성들이 강인한 기량을 보여줄지, 그런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자란 여성들의 세상은 얼마나 다를지, 기대가 된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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