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수능 영어 31~40번 지문 대부분, 美 석·박사 전공서적에서 인용”
  • 박나영 기자 (bohena@sisajournal.com)
  • 승인 2023.06.23 11:05
  • 호수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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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성 전 서울시립대 영어학 교수, 최근 5년간 수능 영어 ‘킬러 문항’ 전수 조사
“지금의 수능은 문제풀이 기술만 익히는 과정으로 전락…‘스피드 게임’식 평가도 바뀌어야”

윤석열 대통령의 이른바 ‘공정한 수능’ 발언을 둘러싼 책임 공방이 정치권과 교육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둔 시점에 윤 대통령이 출제 방향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학생과 학부모들이 불안과 혼란에 휩싸였다. 이에 국민의힘과 교육부는 6월19일 당정 협의를 통해 이른바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이 ‘사교육 광풍’의 원인이라고 지목하면서 수능 출제에서 배제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정책으로 불확실성이 더 커지자, 학생과 학부모들은 학원가를 돌며 ‘킬러 문항’이 나오지 않을 경우 어떤 과목에 승부를 걸어야 할지 새 전략을 짜느라 분주하다. 학원가는 노선을 바꿔 이른바 ‘친윤 문제’(준킬러 문항) 마케팅에 바쁜 모습이다. 

이와 같은 수능 논란을 남다른 심정으로 대하고 있는 학자가 있다. 바로 임종성 전 서울시립대 영어학 교수다. 그는 수능 영어과목의 난이도에 오랜 기간 문제의식을 가지고 관련 데이터를 모아왔다. 그는 2021년 정년퇴임 후 지금까지 지난 5년간 수능 영어에 출제된 초고난이도 문제 지문들의 출처를 모두 찾아 정리한 자료를 시사저널을 통해 공개했다. 임 전 교수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수능 영어에서 ‘마의 구간’이라고 불리는 31~40번 문제 지문 대부분은 미국 대학 전공서적 또는 석·박사 전공서적들에서 인용됐다. 과목은 인류학, 교육공학, 심리학, 유전공학, 경제학 등 광범위하다. 

임 전 교수는 “고등학생의 배경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지문이 출제되고 있다”면서 “초고난이도 문제들이 출제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수능 공부는 ‘문제풀이’나 ‘정답을 찾는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시사저널은 6월21일 임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수능 영어의 문제 출제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그리고 해결책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임종성 전 서울시립대 영어학 교수 ⓒ임종성 제공

“킬러 문항에 수능 ‘정답 찾는 기술’ 익히는 과정 됐다”

수능 영어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4년 서울시립대에 부임해 학생들에게 영어학을 가르쳐왔다. 전공과목이든 교양과목이든 학생들의 영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매년 습관처럼 수능 문제를 살펴봤다. 수능에 출제된 문제 지문들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어서 그걸 풀어낸 아이들이 영어를 꽤 잘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상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수능 지문을 봐도 해석을 못 하니 빈칸에 들어갈 정답 찾는 기술만 배우고 있었다. 수능에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수능에 출제된 지문의 출처를 찾기 시작한 건 언제인가.

“교육대학원에서 현직 교사들을 상대로 영어문법 석사 과정을 가르치면서, 수능 기출문제를 다뤘는데 지문들을 보니 황당했다. 자료를 모아봐야겠다는 생각에 2021년 8월 정년퇴임한 후에 수능 문제에 나온 지문들의 출처를 찾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수능 ‘킬러 문항’이 논란이 되고 있어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공개하고 문제 제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짚어본다면.

“지난해 영어과목에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틀린 문제 1위의 오답률은 83%였다. 이 정도면 고등학생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낸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학생에게 이 문제를 풀게 했더니 틀린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문제 지문의 출처는 《The Pivotal》이라는 책인데, 아마존에서 지구과학 전공서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2021년 영어 오답률 1위였던 문제 지문의 출처도 《Robot Ethics》라는 공학 전공서적이었다. 2020년 영어 오답률 1위 문제의 지문 또한 《Foundations of Educational Technology》라는 교육공학 전공서적에서 인용했는데, 아마존에서는 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적합한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전문 학술지에서 인용된 지문들까지 있다. 2020년 36번 문제의 지문은 토마스 리드(Thomas Rid) 영국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교수의 논문 《Th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서 인용했다. 위키피디아에서 이 논문을 군사·외교정책연구서로 분류하고 있다. 2019년 32번 문제의 지문은 레빈(I. Levin)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 교수의 논문을 인용했다. 이같이 전공서적, 심지어 석·박사들이 읽는 책 내용을 지문으로 출제하기 때문에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조차 해석하기가 어렵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제자에게 수능 문제를 보여주면서 미국 SAT(미국 대학수능시험)와 비교해 보라고 했더니 미국의 GRE(미국 대학원 입학자격시험)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상황이니 아이들이 사교육을 통해 정답 찾는 기술을 배운다.”

전공서에 전문용어가 많아 해석이 어렵다는 의미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2021학년도 영어 36~37번 문제를 예로 들겠다. 이 문제 지문의 출처는 《Green Energy and Efficiency》라는 경제학 전공서적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externality(외부성)’라는 핵심 단어를 이해해야 하는데 경제학에서 이 용어는 ‘외부 효과’라는 의미로 쓰인다. 외부 효과는 생산자나 소비자의 경제활동이 시장 거래에 의하지 않고 직접적 또는 부수적으로 제3자의 경제활동이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전공자들이 아니고선 알 수 없는 개념이다. 고등학생들이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문제를 풀 수 있겠나.”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 출제가 영어공부를 방해한다는 것인가.

“출제 지문의 수준이 인터넷에서 수험생을 가르치는 영어 강사들도 ‘해석은 되는데 이해는 안 된다’고 말할 정도다. 학원 강사들의 수업을 들어봤더니 내용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빈칸이 나오면 어디를 봐라’는 등 문제풀이 기술만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수능은 공부가 아닌 문제풀이일 뿐이다. 학생들의 배경지식을 이해하고 문제를 출제해야지, 접해 보지도 못한 인류학, 교육공학, 심리학, 유전공학 내용의 지문을 읽고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겠나.”

ⓒ임종성 전 시립대 영문학 교수 제공
2020년 수능 영어 34번 문제의 지문은《Foundations of Educational Technology》라는 교육공학 전공서에서 인용했다. 아마존은 이 책이 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적합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임종성 제공

“고교생 배경지식 수준으로 수능 문제 내도 충분히 변별력 있어”

소위 ‘킬러 문항’을 배제하면 어떻게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수능 문제와 교과서 수준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수능 지문처럼 어려운 문제를 모아놓은 교재로 공부한다. 교과서는 뒷전이다. 교과서인 능률출판사 영어책 목차를 보면 여행, 자기계발 등 학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주제와 교과서 수준의 문제를 출제해도 충분히 변별력을 가질 수 있다. 미국 SAT는 교과과정 수준과 그에 맞는 주제로 출제하고 있다.”

수능 출제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우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연구원들이 미국의 SAT를 모델로 철저히 연구·분석해 교과 과정에 맞는 문제를 출제해야 한다. 예를 들어 SAT에는 “인터넷 쇼핑몰에 있는 ‘좋아요’ ‘나빠요’를 통해 상품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등 학생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접해본 내용,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지문을 출제한다. 아이들에게 수능 문제 푸느라 땀 흘리게 하지 말고 수능 출제 전문기관을 만들어 연구위원들이 땀 흘려 문제를 만들어야 한다. 영문과 교수 몇 명 불러 감금해 놓고 며칠 만에 문제 만들어내라고 하면 기출문제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너무 촉박하게 문제를 풀게 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현재 영어 듣기평가가 끝난 후 45분 만에 28개 문제를 풀도록 하고 있다. 한 문제를 1분~1분30초 만에 풀어야 하는 ‘스피드 게임’이다. 문제 해결 능력을 측정하려면 학생들이 여러모로 생각하고 검토해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줘야 한다. 영어 과목은 최소 2시간은 줘야 한다고 본다. 하루 만에 수능 모든 과목을 다 치르게 하는 이유는 교육공무원들이 편하기 위해서다. 하루 만에 끝나야 관리하기가 쉬우니까. 그러나 중국만 해도 1100만 명의 학생이 3~4일에 걸쳐 시험을 본다. 독일, 영국, 이탈리아도 최소 이틀간 시험을 보고 시험문제도 대부분 주관식이다. 한국은 최근 국어가 어려워지면서 학생들이 1교시 국어시험에 낙담해 다음 과목까지 망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과목별로도 분배가 필요하다.”

한국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짚는다면.

“아이들이 영어 실력을 기를 수 없도록 가르친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문법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대학 입학생들을 보면 문법을 아예 배우지 않은 아이들 천지다. 미국에서 영어(국어)는 글쓰기를 위해 가르친다. 영작문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단의 속성이다. 토픽(주제) 문장을 쓰고 아래에 근거나 예시 등으로 문단을 완성한다. 그런데 우리 수능에서 토픽 문장을 빼버리고 중간 단락만 가져와 지문으로 제시한다. 영작문과 문단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핵심을 뺀 상태에서 어떻게 전체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시험이란 게 아이들의 잠재력을 키울  수 있는 도구가 돼야지, 어떻게 하면 이 아이와 저 아이를 차별화시키느냐가 핵심이 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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