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 없다…최악 시나리오 앞에 놓인 대법원
  • 이혜영 기자 (zero@sisajournal.com)
  • 승인 2023.10.05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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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재현된 ‘대법원장 공백’, 장기화 할 경우 대법관 연쇄 공백
이균용 후보자 임명동의안 칼자루 쥔 민주당, 당론 못 정한 채 고심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9월2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9월2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법원이 ‘수장 공백’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닥뜨렸다. 30년 만에 대한민국 최고 사법기구를 이끄는 대법원장이 공석으로 남겨지면서 사법부 전체가 혼돈에 빠져드는 모양새다. 더 큰 문제는 이 공백이 언제 메워질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야당은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에 등을 돌렸다. 법원행정처와 대법원장 인사청문회준비단이 총력전을 벌이고 있지만 코앞에 닥친 국정감사와 보궐선거, 장관 청문회까지 굵직한 정치 이슈와 키를 쥔 더불어민주당 내 상황이 얽히고설켜 결과는 안개속이다. 자칫 내년 총선까지 ‘제17대 대법원장’을 맞이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법 암흑기가 펼쳐질 것이란 암울한 전망마저 나온다.

 

비상 걸린 대법원, 1대1 설득에 설명자료까지 

10월5일을 기점으로 대법원장 공석 사태는 11일째를 맞았다. 추석 연휴 종료 직후부터 대법원 구성원들의 시선과 발길은 모두 국회를 향했다. ‘부결’로 기울어져 있는 야당 의원들을 이균용 후보자 임명동의안 표결일인 10월6일 ‘데드라인’까지 설득하겠다는 이유에서다. 인사청문회준비단 소속 판사들과 고위 관계자들이 국회로 총출동해 대면 설득에 돌입했고, 60쪽에 달하는 설명자료도 만들어 배포했다. 1988년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에 이은 두 번째 임명동의안 부결 상황이 35년 만에 재현되는 사태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10월6일 국회 문턱을 넘게 되면 대법원장 공백 사태는 ‘진통 끝 극적 타결’로 마무리될 수 있다. 그러나 부결되면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대법원장 임명은 장관과 달리 국회의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재적 의원 과반 출석, 출석 의원 과반 동의’를 충족해야 한다는 점에서 민주당(168석)이 칼자루를 쥔 셈이다.

임기 종료 전 마지막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한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9월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자리에 앉아 있다. ⓒ 연합뉴스
임기 종료 전 마지막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한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9월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자리에 앉아 있다. ⓒ 연합뉴스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면 대법원은 현재처럼 안철상 선임대법관이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맡는다. 최고법원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상당 부분 제한적으로 행사된다는 의미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법원행정처장 제외)이 심리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선고는 타격이 불가피하다.

과거 대법원장 없이 전원합의체가 열린 전례는 있지만, 극히 제한적 경우인 데다 대법원장이 빠진 상태에서 심리와 판결이 진행되는 것은 전원합의체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현재 전원합의체가 심리 중인 사건은 5건이다. 대법원 3개 소부의 선고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안 권한대행에 행정 업무가 몰리면 나머지 대법관들의 업무가 가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법관 1인이 맡는 상고심 재판 수는 연간 4000건에 달한다. 결국 공석 사태로 인한 혼선과 파행으로 인한 피해가 국민과 국가에 돌아오게 된다.

사법행정도 가시밭길이다. 대법원장 권한대행은 역할 규정과 범위가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고 정무적 부담도 커 ‘현상 유지’에 방점을 두게 된다. 이미 대법원장 공석으로 인한 문제는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10월5일 신임 법관들에게 수여되는 임명장에는 ‘대법원장 권한대행 대법관 안철상’이 새겨졌다. 대법원장 명의로 수여돼야 하지만 비상 상황에 입직한 새내기 법관들은 ‘다른’ 임명장을 받았다.

대법관 연쇄 공백 사태도 피할 수 없다. 권한대행 업무를 맡는 안 대법관과 민유숙 대법관은 내년 1월1일 퇴임한다. 대법관 인선 절차는 천거와 검증을 거쳐 대법원장이 제청하며 통상 3개월이 소요된다. 지금부터 차질 없이 절차를 밟아 나가야 대법관 2인의 퇴임 시점까지 새 대법관 인선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제청권을 가진 대법원장이 공백 상태라면 얘기가 다르다. 대법원장은 물론 대법관 줄공백이 전개될 수 있다.

여기에 대법원과 함께 양대 최고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 유남석 소장 임기 종료(11월10일)까지 겹치면서 전반적인 국가 사법 체계가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월2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을 찾은 홍익표 신임 원내대표와 면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월2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을 찾은 홍익표 신임 원내대표와 면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법방해’ 역풍 우려 속 당론 못 정한 野

대법원장 인선 결정권을 쥔 더불어민주당은 셈법이 복잡한 모양새다. 당초 10월4일 의원총회에서 이 후보자에 대한 찬반 당론 결정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었다. 당내에서는 이 후보자의 비상장 주식을 포함한 재산 및 자녀 의혹, 대법원장으로서의 자질 부족을 맹공하며 ‘부적격자’로 판단하는 여론이 우세했다.

홍익표 민주당 신임 원내대표는 공개적으로 “대법원장 공백에 따른 혼란보다 부적절한 인물이 취임하는 데 따른 사법부 공황 상태가 더 걱정”이라며 “이런 인물들을 계속 보내면 제2,제3이라도 부결시킬 생각”이라고 경고했다. 이 후보자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야당 간사인 박용진 의원은 의총에서 특위 위원 전원이 ‘매우 부적절한 인사’라는 의견을 냈다며 ‘부결’을 호소하는 친전을 돌리기도 했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가결로 후폭풍이 몰아친 당내 상황을 수습하고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결정으로 윤석열 정부에 반격 고삐를 죄는 중차대한 시점에 이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표결은 또 다른 변수가 됐다. 일각에선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사활을 건 민주당이 이 후보자에 대한 부결 당론을 끌어내 단일대오를 형성하는 모습을 연출할 것이란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자율 투표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과 ‘사법방해’ 역풍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신중 모드’를 취했고, 결국 이 후보자에 대한 당론 결정 여부는 표결 당일인 10월6일 재논의키로 했다. 막판 합의 가능성을 열어둔 민주당은 당내 의견과 여론 추이를 살피며 표결 당일까지 이 후보자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전망이다. 부결 처리 후 새 후보자가 지명되더라도 10월27일까지 국회 국정감사가 예정돼 있어 청문회 개시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이렇게 되면 다음 본회의가 열리는 11월9일 표결 가능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

여당은 대법원장 공석이 해를 넘길 우려가 커졌다며 책임을 전적으로 야당에 돌렸다.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30년 만에 대법원장 공석 사태가 현실화되는 초유의 사태“라며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주3회 법원 출석 전망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사법부 길들이기’를 통해 이 대표의 재판에 영향이라도 미쳐보려는 얄팍한 꼼수는 아닌가“라고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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