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는 세상 속 소년의 ‘성장’ 스토리, 《화란》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14 16:05
  • 호수 1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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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중기 노개런티 출연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 
위태로운 소년 일상에 번지는 폭력의 파장 끈질기게 주시

《화란》은 네덜란드를 뜻하는 한자어(和蘭)다. 주인공 연규(홍사빈)가 언젠가는 엄마와 함께 당도하길 소망하는 곳이다. 한자를 달리 쓰는 화란(禍亂)은 재앙과 난리라는 뜻이다. 연규의 상황은 이 뜻에 더 알맞아 보인다. 학교와 가정 모두에서 극심한 폭력에 노출된 연규에게는 ‘禍亂’을 피해 ‘和蘭’으로 향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처럼 보인다. ‘거긴 다들 비슷비슷하게 산다’는 별것 아닌 이유가 연규에겐 절실하다. 

제76회 칸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톱스타 송중기의 노개런티 출연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신작 《화란》이 베일을 벗었다. 작품의 영어 제목(hopeless)처럼 희망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상 안에서 한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변화할까. 성장이란 것이 가능하긴 할까. 영화는 위태로운 소년의 일상에 번지는 폭력의 파장을 끈질기게 주시한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잔혹한 폭력의 악순환 

세상 어딘가에는 이런 삶도 있다. 흐르지 않고 고여만 있는, 흙탕물 웅덩이 같은 삶. 《화란》은 학교 운동장에서 누군가에게 다가가 돌로 힘껏 머리를 내리치는 연규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연규가 내던진 돌로 물웅덩이에는 서서히 피가 번진다. 이 강렬한 오프닝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연규의 가까운 미래를 내비친다. 흙탕물에 가라앉는 대신 몸부림치기로 한 어린 소년의 삶에는 가혹하게도 피의 세계가 스며들 참이다. 

의붓아버지의 가정폭력을 지옥처럼 견디던 연규는 우연히 치건(송중기)을 만나 그와 함께 일하게 된다. 치건은 오토바이를 훔쳐 되파는 사채업으로 동네를 장악하다시피 한 폭력조직의 중간 보스다. 학교와 집에서의 폭력을 피해 달아나 당도한 또 다른 폭력의 공간. 그 안에서도 일말의 양심과 선한 마음을 지키려던 연규는 점차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영화는 고요한 피비린내로 가득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계관, 어둡고 비정한 삶의 방식, 폭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인공들의 상황까지 누아르 장르 본연에 충실한 인상이다. 《화란》을 연출한 김창훈 감독은 “장르 구현이 가장 앞선 목표가 아니라, 뒤틀리고 폭력적인 환경이 한 사람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우선 지켜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장르는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한 공간에서 가족으로 같이 살아가는 의붓아버지와 그의 딸 하얀(김형서)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가정을 포함해 한 사람의 근간을 만드는 배경에 대한 탐구다. 가정의 울타리에서 보호받지 못한 이들의 목숨을 건져 올린 것이 또 다른 폭력의 세계라는 점은 《화란》이 품은 비정한 아이러니다. 

영화는 마치 거울처럼 마주하는 연규와 치건이 함께하는 순간들을 따라간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선을 빠르지 않은 호흡으로 끈기 있게 그려낸 점이 작품의 뚝심으로 느껴질 정도다. 애초에 치건이 연규를 받아들인 것은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각자의 아버지로부터 생긴 폭력의 상처를 몸에 깊게 새긴 둘은 서로의 과거와 미래다. 연규에게 치건은 의지하고 싶은 존재이자 닮고 싶은 존재, 혹은 어느 순간 넘어서고 싶은 존재가 된다. 치건의 곁에서 연규는 서서히 변화한다. 아직 어리기에 자기 파괴의 충동을 더 빠르게 흡수하기도 하고, 살아남기 위해 자기 안의 인간성을 죽여가기도 한다. 연규를 연기한 신예 홍사빈은 “연규의 선택과 변화를 하나하나 미리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대신, 상황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여 표현하려 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호흡은 느린 편이지만 군더더기는 없다. 꼭 필요한 표현들로만 압축해 남긴 듯한 인물들의 대사는 간결하고, 연규와 치건을 연결하는 상징적 이미지들은 어렵지 않은 선에서 여러 해석을 자극한다. 잔혹한 상황 묘사뿐 아니라 심리적 폭력의 수위가 높은 편이라 호불호는 적잖게 갈릴 만하지만, 장르적 허용 안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추구한 영화라는 데는 이견이 생기기 어렵다. 화려한 액션으로 굳이 포장하지 않고, 극 전체를 감싸는 끈적하고 위태로운 기운을 중심에 두고 밀어붙인 영화의 선택은 호기롭게 느껴질 정도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역시 또 하나의 성장 

《화란》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움으로 승부하는 영화라 말하긴 어렵다. 폭력의 수렁에 빠진 채 가라앉기를 택한 자, 반대로 아직 발버둥 칠 기력이 남아있는 자 모두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방식의 절망으로 향한다. 분명 철 지난 누아르의 공식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들도 있다. 다만 애초에 영화가 세웠던 목표대로, 희망이 쉽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작동 방식을 타협 없이, 정통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인상적이다. 

범죄와 폭력은 극단적인 스토리텔링 소재이기도 하지만, 분명 그 안에서만 빚어지는 관계와 성질도 존재한다. 연규와 치건의 삶은 애초에 선택의 영역조차 정해져 있는 환경 안에서 세워졌다. 꿈꾸는 것, 남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 왜 이렇게 사는지 질문하는 것. 치건에 의하면 이것은 ‘산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답게 사는 걸 포기해야 역으로 살아남는 이들의 모습은 역으로 인간다운 성장의 조건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가 후반으로 향하면, 폭력의 연쇄 작용 안에서 그 자신이 폭력의 일부가 돼버린 소년의 이야기를 성장담으로 바라봐야 할지의 문제가 남는다. 끝까지 희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듯한 엔딩에 이르면 끝없는 지옥으로 빨려드는 기분마저 든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것이 거창한 가치가 아니라 이전에 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해내는 일이라면, 《화란》 역시 성장영화의 카테고리에 있다. 김창훈 감독은 “성장은 삶에서 똑 떨어지는 한 방향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옳은 방향의 성장도 있지만, 어둡고 부정적인 형태의 성장도 있을 거라 본다. 다만 그 끝에서 인물이 모든 과정을 딛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칠흑 같은 방향이지만, 연규의 마지막 모습은 또 하나의 성장의 형태가 아닌가 한다.” 세상 어딘가에는 이런 삶도, 이런 성장도 있을 것이다. 

 

■ 송중기의 변신, 홍사빈의 발견 

연규 역의 홍사빈, 하얀 역의 김형서(뮤지션 ‘비비’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오디션을 거쳐 배역을 맡았다. 반대로 송중기는 누아르 작품에 녹아들기를 희망한 배우 자신이 먼저 적극적으로 각본을 수소문해 읽은 후 제작진에 출연을 제안한 경우다. 《화란》의 제작사는 《신세계》(2013), 《무뢰한》(2015), 《아수라》(2016), 《헌트》(2022),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최악의 악》(2023) 등을 제작한 사나이 픽쳐스다. 

김창훈 감독은 “훨씬 냉정하고 잔혹했던 치건은 송중기를 만나 인간적인 온기와 연민이 입혀졌다”고 귀띔했다. 신선한 인상마저 주는 이 캐스팅은 송중기의 필모그래피 내에서 분명 유의미한 분기점이 될 만한 변신이다. 서서히 얼굴을 알리고 있는 홍사빈의 활약도 인상적이다. 송중기의 여유와 관록에 팽팽하게 맞서는 에너지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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