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옛날 옛적에 인사청문회가 있었다?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23 08:05
  • 호수 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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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옛날 옛적에 인사청문회라는 것이 있었다’는 말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지난 2000년에 처음 도입된 인사청문회 제도는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 기능 실현이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정부 요직 인사가 있을 때마다 일정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는 있지만 대부분 ‘대통령 뜻대로’로 귀결된다. 청문회에 참석한 후보자 중 일부는 기본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자료조차 내놓지 않고, 질의하는 의원을 향해 오히려 큰소리치기까지 한다.

최근에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이 같은 풍경은 어김없이 반복됐다. 후보자는 버티기로 일관하고, 그를 상대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의원들은 양편으로 갈려 본질과는 상관없는 문제를 놓고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다. 그 볼썽사나운 추태에 화룡점정을 하듯 압도적 퍼포먼스를 보여준 이는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다. 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그가 운영하던 온라인 매체와 관련한 ‘주식 파킹(주식을 제3자에게 맡기는 행위)’ 등 여러 의혹이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 대한 후보자의 응답은 전혀 엉뚱한 형태로 나타났다. 인사청문회 전에 여가부의 존폐에 대해 “드라마틱하게 엑시트(퇴장)하겠다”고 밝혔던 그는 청문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돌연 현장을 ‘엑시트’해 사라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돌발행동을 두고 언론에서는 ‘김행랑’ 혹은 ‘김행방불명’이라는 표현이 잇따라 나왔고, 한 야당 국회의원은 이를 ‘각종 논란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듣고 싶었던 국민들과 국회를 모독한 행위’라고 규정하며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칭 ‘김행랑 방지법’을 발의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인사청문회 대상인 임명직 후보자가 청문회 도중에 퇴장하면 후보직에서 사퇴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담은 인사청문회법 개정안을 내놓겠다는 얘기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연합뉴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연합뉴스

김행 후보자는 결국 강서구청장 보선 결과가 발표된 직후 자진 사퇴해 인사 자체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그렇다고 인사청문회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하는 근본 문제까지 원점으로 회귀된 것은 아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장관 등 주요 공직자가 인사청문회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즉 여야 합의 없이 임명된 사례는 벌써 18건에 달한다. 이는 비단 이번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전 문재인 정부에서도 무려 30여 차례에 이르는 임명 강행이 벌어져 비난이 들끓었다. 2000년 이후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장관급 인사를 임명한 사례는 노무현 정부 3건, 박근혜 정부 10건, 이명박 정부 17건으로 꾸준히 늘어나다가 문재인·윤석열 정부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인사청문회 무용론’에 기름을 붓는 상황이 이어졌다.

주요 공직 후보자에 대해 국회로 하여금 국민을 대신해 ‘압박 면접’을 제대로 해 달라는 취지로 마련된 제도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당사자들은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라며 인사청문회 탓에 꼭 필요한 인물을 적재적소에 들이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지만, 그건 그냥 핑계일 뿐이다. 좀 더 흠결 없는 인물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자백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2021년 청문회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로부터도 “30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깔끔하게 하신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는 찬사까지 들었던 안경덕 전 고용노동부 장관과 같은 인물은 다만 시야가 문제일 뿐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꼭 해야 할 노력을 게을리한 채 제도 탓만 하며 ‘맘대로 인사’를 계속한다면 국정 혹은 정치는 끝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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