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의(議)와 논(論)으로 읽는 한국 정치 현주소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oxen7351@naver.com)
  • 승인 2023.10.27 17:05
  • 호수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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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공부를 시작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정보 중 하나가 의(議)와 논(論)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국내 번역서들을 보면 의(議)도 ‘의논하다’로 번역하고 논(論)도 ‘의논하다’로 번역하고 있었다.

의(議)는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을 낸다는 말이고 논(論)은 그저 어떤 일에 대해 평한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결정적 차이는 의(議)는 자격과 책임이 기반이 되지만 논(論)은 자격과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때 관리가 올리는 상소는 의(議)가 되지만 일반 선비가 올리는 상소는 논(論)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사실 우리는 이 둘을 엄격히 분리해 사용하고 있다. 국회 의사당(議事堂)이라 하지 논사당(論事堂)이라 하지 않고 의원(議員)이라 하지 논원(論員)이라 하지 않는다.

 

자격과 책임을 기반으로 미래를 얘기하는 議

반대로 언론(言論)이라 하지 언의(言議)라고 하지 않고 논객(論客)이라 하지 의객(議客)이라 하지 않는다. 또 여론조사(輿論調査)라고 하지 의론조사(議論調査)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평론가는 있어도 정치평의가는 없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일차적으로 의(議)는 자격과 책임이 중요하고 논(論)은 자격과 책임에서 자유롭다.

그런데 의(議)보다 논(論)이 중요한 분야가 있다. 법조가 그것이다. 검사나 변호사나 판사가 하는 말은 모두 의(議)가 아니라 논(論)이다. 검사의 논고(論告)나 변호사의 변론(辯論), 그리고 판사의 판결(判決)은 모두 의(議)가 아니라 논(論)이다. 의(議)는 때로는 논리나 근거가 없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논(論)은 반드시 논거(論據)가 있어야 한다. 간혹 논리가 취약한 판사의 판결이 많은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의(議)와 논(論)을 가르는 좀 더 확실한 잣대는 미래와 과거다. 논(論)은 기본적으로 지나간 일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논(論)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에 의(議)는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미래학은 그래서 전형적인 의(議)에 속한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논(論)하는 말을 하는 사람보다는 의(議)가 담긴 말을 하는 사람이 존중받기 마련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8월15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과거를 論하는 법조인들이 끌어가는 한국 정치

정치는 논(論)이 아니라 의(議)에 속한다. 정치인의 말이 논(論)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의(議)가 되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인은 과거보다 미래의 일에 대해 자격과 책임을 갖고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를 보면 태반이 논(論)이다. 즉 과거 타령이나 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법조인 출신들이 우리 정치를 지배한 결과라고 본다. 대통령, 여당 대표, 야당 대표, 서울시장이 모두 법조인 출신이다.

법조인은 평생을 지나간 일을 법률적으로 따지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단시간에 미래를 만드는 정치인으로 변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정당 경험이 이런 변신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당이 취약한 한국 정치에서는 이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국민도 이번 대선에서 보았듯이 정당 무경험자를 오히려 선호하고 있다.

다음 대선도 이대로 가면 법조인 대 법조인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다. 더 큰 난국은 이처럼 과도하게 법조인 편향적인 정치인 인적 구성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br>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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