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영웅’ 中 펑더화이의 몰락
  • 시사저널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15 08:00
  • 호수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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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진짜 중국 이야기]
마오쩌둥이 빚어낸 권력 투쟁 드라마(3)

중국공산당은 1959년 8월2일부터 16일까지 중국 4대 피서지 가운데 하나인 해발 1500m의 루산(廬山)에서 제8기 중앙위원회 8차 전체회의(8기 8중전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 주도로 1957년 9월(8기 3중전회)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의 정책 오류 여부에 대한 당내 토론이 가장 주목받았다. 마지막 날 회의 단상에 등장한 당 주석(현 당 총서기) 마오쩌둥은 격렬한 어조로 연설을 시작했다.

“당내의 우경 기회주의 분자들은 원래부터 무산계급 혁명가들이 아니었다. 무산계급 대열에 끼어든 프티 부르주아(소자산계급)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도 아니었고, 그저 당내에서 함께 길을 걷던 인물들이었을 뿐이다. 혁명 군중들은 대해(大海)의 노도(怒濤)와 같아서 일체의 요사스러운 마귀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지하 땅굴에 차려진 중공군 사령부를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가운데)과 중공군 사령관 팽더화이(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양측 부장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뉴스뱅크이미지
지하 땅굴에 차려진 중공군 사령부를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가운데)과 중공군 사령관 팽더화이(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양측 부장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뉴스뱅크이미지

한국전쟁 국면 전환시킨 펑더화이

마오의 연설이 끝나자 다음 회의 절차는 ‘펑더화이(彭德懷)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反黨) 집단들의 착오에 대한 결정’이라는 문건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회의의 결정으로 당 정치국원 겸 국무원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각각의 직위를 박탈당했다. 펑더화이는 그길로 정치무대에서 자취를 감췄고, 15년 뒤인 1974년 11월29일 베이징(北京) 서쪽의 화장터에서 ‘왕촨(王川), 76세’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비밀리에 화장됐다. 베이징 시내 서쪽의 301군사병원에서 결장암으로 사망해 화장터로 옮겨진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6년 9월9일 마오가 80세로 사망하자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를 열어 중국 홍군 최고의 지도자 펑더화이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평반(平反) 결정을 내렸다. 중국공산당은 곧바로 인민대회당에서 펑더화이 추도대회를 열었고 당 중앙군사위 주석 덩샤오핑이 추도사를 읽었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는 유비(劉備)의 관우(關羽)나 장비(張飛)에 해당하는 장수였다. 마오보다 5년 늦은 1898년생인 펑더화이는 마오와 같은 후난(湖南)성 샹탄(湘潭)현 출생이었다. 펑더화이는 소년 시절 산에서 나무땔감을 모으고, 소를 기르던 중 15세에 관청을 상대로 벌어진 “쌀을 방출하라”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체포돼 중국 최대의 호수 둥팅(洞庭)호 제방공사 공사장 인부로 강제노역을 하던 중이던 18세 때 국민당 군인이 됐다. 그러나 자신에게 못되게 굴던 상관을 살해하고 또다시 체포돼 압송되던 중에 탈출해 원래 이름이던 더화(得華)를 더화이(德懷)로 개명했다. 

그는 1928년 30세의 나이로 창당 7년이 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국민당과 벌인 내전에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각종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둬 중국공산당 홍군의 대표적인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1935년 구이저우(貴州)성 준이(遵義)에서 열린, 중국공산당의 운명에 관한 중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주장, “농촌을 먼저 장악하고 도시에 대한 포위전을 벌인다”는 노선에 찬성을 표하면서 마오 측근의 대표적인 지휘관 자리를 확보했다. 펑더화이가 하도 많은 승전보를 전a마오쩌둥은 한때 펑더화이를 ‘대장군(大將軍)’으로 묘사한 시를 한 수 지어 보낸 일도 있었다.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에도 개입했다. 1950년 6월 마오가 김일성, 스탈린과 사전에 음모를 짜서 일으킨 한국전쟁이 미군의 개입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압록강 부근까지 밀리자 마오가 선택한 것은 펑더화이를 한반도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마오가 주도하는 중국공산당 정치국은 1950년 10월 확대회의를 열어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압록강 너머로 투입해 전세의 역전을 시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중국공산당 기록에 따르면, 펑더화이는 당시 군사장비도 낙후하고, 후방지원 공급체계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데다 한반도 지형에 생소한 상황에서 벌어진 중국군과 유엔군 사이의 제1차 조우전인 장진호 전투에서 무려 1만5000명의 한국군과 유엔군 사상자를 내는 대승을 거뒀다. 펑더화이는 주로 상대방의 후방지역으로 우회해 들어가서 상대방을 전후방에서 협공하는 전술을 잘 구사해 맥아더의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한반도 전쟁 국면을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편지 한 장으로 정치적 음모에 빠지다

전쟁 중 병이 난 펑더화이는 참전 1년 반 만인 1952년 4월 일시 귀국해 군병원에 입원했다 1953년 6월 한국전쟁에 다시 투입됐고, 7월27일 판문점 휴전협정에 중공군 대표로 서명했다. 종전과 함께 펑더화이는 북한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영웅’으로 표창을 받았다. 한국전쟁에서 개선장군이 돼 귀국한 펑더화이는 중국공산당으로부터도 ‘영웅’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펑더화이가 결정적으로 마오 눈 밖에 난 것은 자신이 마오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은 뒤인 1959년 7월13일 마오의 측근 입장에서 마오를 걱정하는 한 통의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액운은 펑더화이가 편지봉투 겉에 ‘마오 주석 친전(親展)’이라고 명기하고 자필 서명을 해서 보낸 편지를 마오에게 바친 이후에 벌어졌다. 펑더화이는 자신이 직접 쓴 그 편지에 서명을 해서 보냈으며, 그 편지가 펑더화이에게 죽음을 가져다줬다. 편지의 내용은 당시 마오가 벌이던 각종 사업이 무리하다는 충고를 담은 것이었고, 이 편지는 나중에 펑더화이가 연루된 ‘만언서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마오에 의해 공식 당내 사건으로 규정지어졌다. 이 편지를 읽은 마오는 측근 비서들에게 “나는 펑더화이가 연안 정풍운동 이후부터 당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결국 당에 복종할 마음이 없었던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펑더화이의 편지를 당내 공식 문건으로 올릴 것을 지시했다. 

펑더화이는 그것이 정치적 음모라는 걸 알고 있었다. 펑더화이는 자신이 마오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라는 점을 믿고, 개인적인 충고의 편지를 보냈는데, 마오는 펑더화이의 편지를 수세에 몰려 있던 당내 역학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펑더화이는 결국 마오가 벌였다가 철저한 실패로 돌아간 대약진운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짜둔 거미줄에 걸려들어 목숨을 잃게 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펑더화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불리한 당내 정치구조에서 벗어난 마오는 결국 대약진운동이라는 무리한 정책을 전환할 기회를 놓치고 중국대륙 전역에서 4000만 명의 아사자를 내는 참상을 빚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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