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룡시장 유명세로 핫한 민간인 통제구역 ‘교동도’
  • 김지나 도시문화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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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한국전쟁 전후 완전히 달라진 섬의 운명
실향민 사연 가득 안아…강화도보다 황해도와 더 교류가 많았던 섬

인천 강화도에서 더 서쪽으로 달리다보면 드넓은 강화만이 배경으로 펼쳐지는 교동대교가 나타난다. 이 대교의 끝에는 섬 전체가 민간인 통제구역인, 교동도가 있다. 교동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검문소에서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절차는 까다롭지 않다. 간단한 인적사항을 써내면 푸른 용이 그려져 있는 출입증을 내어 준다. 출입증을 받아 들고 조금 더 달리다 보면 마침내 교동도에 들어갈 수 있다.

교동도에서는 바다 건너 북한 땅이 지척에 보인다. 섬에서 가장 높은 화개산에 오르면 황해도 연백평야가 마치 손에 잡힐 듯하다. 황해도와 교동도 사이의 거리는 제일 가까운 곳이 3㎞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 주민이 귀순하기 위해 바다를 헤엄쳐서 건너와 교동도 마을의 어느 집 문을 두드렸다는,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다.

이 황해도 연백군이 잘 보이는 곳에 망향대가 있다. 한국전쟁 때 교동도로 건너온 피난민들을 위해 만든 제단이다. 교동도에는 황해도와 가까운 만큼 그 지역 출신의 실향민들이 많았다. 지금은 지역 명소가 된 대룡시장은 실향민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만든 삶의 터전이었다. 시장을 만든 장본인인 실향민 1세대들은 이미 많이 돌아가시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전쟁과 분단이 만들어 낸 실향의 아픔은 어슴푸레한 그림자처럼 시장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교동도 화개산 정상에서 보이는 황해도의 연백평야 ⓒ김지나
교동도 화개산 정상에서 보이는 황해도의 연백평야 ⓒ김지나

 

황해도에 더 가까운 섬의 문화

무심코 들어간 어느 강정 가게에서는 할아버지 두 분이 황해도식 강정을 만들고 계셨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후, 먹고 살기 위해 강정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셨다고 했다. 시장 골목의 한 주막에서는 기타를 연주하는 음악소리와 함께 구슬픈 노래가 들려왔다. 이름도 낯선 ‘댕구지 아리랑’이라고 한다. 댕구지는 황해도 연백군에 있는 한 마을의 이름이다. 이 마을에 살다 남한으로 피난 온 어느 어르신이 직접 가사를 쓰셨다는 사연이 얽혀 있었다. 잠시만 전쟁을 피하려 했던 것이 이렇게 오랜 이별이 될 줄 몰랐다는 실향민들의 이야기는 언제 어떻게 들어도 가슴이 아프다.

교동도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딘가 독특한 억양이 느껴진다. 황해도 사투리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와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주민들은 교동도가 강화도와는 전혀 다른 지역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강화도보다 오히려 황해도와 더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음식문화나 풍습도 황해도 연백군과 닮아있다고 한다. 서해바다를 가로지르는 북방한계선은 단지 국토를 갈라놓음에 그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하나의 문화를 공유했던 지역을 억지로 두 갈래로 떼어놓은 것이었다.

최근 교동도는 1970년대의 골목을 연상시키는 대룡시장이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꽤나 핫한 관광지가 됐다. 2014년 교동대교가 만들어지고 여러 가지 환경 개선 사업이 이루어지며 관광객이 더 늘었다고 한다. 한적한 교동도의 자연을 만끽하려는 트래킹족, 자전거족들도 많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족들의 유배지였던 역사가 관심을 끌기는 해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 섬이 어떤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어쩐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실향민들이 만들었던 대룡시장의 골목 풍경. 시장 내에 있는 한 주막에서는 주말이면 기타 연주공연이 열린다. ⓒ김지나
실향민들이 만들었던 대룡시장의 골목 풍경. 시장 내에 있는 한 주막에서는 주말이면 기타 연주공연이 열린다. ⓒ김지나

 

70년대 향수 가득한 도시민의 휴양지

사실 조선시대까지 교동도는 해상에서 대단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방한계선을 지우고 온전한 한반도 지도를 보게 되면, 교동도는 서해에서 경기만으로 들어가는 관문의 위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교통, 무역, 군사적으로 요충지의 역할을 담당했던 지역이었다. 지금은 소박한 시골 어항에 지나지 않지만, 교동도의 남산포구는 고려시대에 송나라 사신들이 개성으로 들어가는 뱃길의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아직도 남산포구 근처에는 사신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신당이 남아 있어 옛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의 삼도 수군을 관할했던 ‘삼도수군통어영’이 남산포에 설치되기도 했다.

분단되기 전 교동도의 멋진 자연 풍경을 묘사한 ‘교동8경’ 중에는 고깃배와 선원들로 가득 찬 포구의 모습을 노래한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원래의 ‘교동8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 많아 ‘신 교동8경’을 새로 지었다고 해, 전쟁 이후 완전히 달라진 교동도의 기구한 운명을 연상시킨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1970년대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지금의 교동도는 도시민들에게 마치 휴식 같은 섬이다. 북한을 마주하고 있는 해안가의 철책선 풍경과 실향민들의 사연이 교동도를 보통의 휴양지와 다른 특별한 장소로 만들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지만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훨씬 다양한 스토리들이 잠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교동도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 속에서 늘 불안과 논란에 둘러싸여 있는 서해5도의 섬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지금까지와는 약간 다른 시선으로 이 지역들을 볼 수 있다면, 우리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의 잠재력을 조금은 더 느낄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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