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열강 침략에 저항했던 아시아의 왕들, 그리고 고종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1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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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23화
고종 서거 100주년 - 왕가(王家)의 비밀

오는 1월 21일은 고종이 서거한지 100년을 맞는 날이다. 3.1운동이 고종 장례식에 맞춰 일어난 사실만 봐도 그의 죽음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우리 근대사에서 고종 만큼 애증이 교차되는 인물도 흔치 않다. 그 나름대로 국권회복에 애쓴 부분이 없진 않으나 총 한번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나라를 넘긴 사실은 우리 자존심을 건드리게 된다. 애써 연민의 정을 느끼다가도 이 대목에 이르러 분통이 터지기 마련이다. 

우리와 같이 제국주의 침략을 겪은 아시아의 다른 왕들은 어땠을까? 히말라야 산맥의 작은 나라 네팔만 해도 고르카 왕조가 1815년 영국군의 침략에 맞서 처절한 항전을 펼쳤다. '쿠크라' 단검 하나로 돌진하는 네팔군에 질려버린 영국은 식민지배를 포기하고 이들을 용병으로 포섭했다. 이후 전세계 전쟁이나 분쟁이 벌어지는 곳엔 어김없이 이들이 등장하곤 했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장을 지킨 이들도 바로 네팔의 '구르카 용병'이었다. 적에게 '발탁'되어 200년 넘게 일자리를 갖게 된 셈이다.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해 왕좌를 걸고 '죽기 살기로 싸운' 아시아 여러 왕들

17세기 초반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착취에 놓인 인도네시아에서도 족자카르타 왕국의 디포네고로 왕자가 1825년부터 무려 5년 동안 식민군대와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20여만 명의 군인과 양민들이 희생됐고, 왕자도 붙잡혀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이 밖에 미얀마 꼰바웅 왕조는 영국과 세 차례 전투를 펼친 끝에 몰락했고, 인도 무굴제국 역시 영국에 대항해 세포이 항쟁을 벌였다가 멸망했다. 이처럼 아시아의 많은 왕실들이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 무력 항쟁을 펼쳤던 것이다.

19세기 초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통일 왕국을 이뤘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통상 마찰을 빚었고, 결국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프랑스의 침략을 맞게 되었다. 이후 수차례 불평등조약으로 영토를 뺏기고 공략과 항전이 거듭된 끝에 1884년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무렵 베트남을 통치한 사덕제(재위 1847~1883)는 조선의 고종(재위 1863~1907)과 닮은 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올라 19세기 가장 오랜 기간 재위를 누렸다. 불행히도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군주'란 점도 같다. 고종은 을사조약으로, 사덕제는 사이공조약으로 각각 일본과 프랑스에 외교권을 뺏기고 사실상 식민지배를 허용한 것이다.

사덕제와 프랑스 왕궁에 도착한 베트남 사절단 모습. 오른쪽은 후에시 트엉바에 있는 그의 묘지
베트남 왕 사덕제(맨 왼쪽)와 프랑스 왕궁에 도착한 베트남 사절단 모습. 오른쪽 사진은 후에시 트엉바에 있는 사덕제의 묘지 ⓒ이원혁 제공

묘하게도 나라를 잃게 된 과정도 판에 박은 듯 하다. 사덕제는 부왕의 쇄국정책을 계승했고 고종 역시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나라 문을 걸어 잠궜다. 천주교 박해로 침략을 당한 점도 같다. 사덕제는 천주교 신자가 40만 명을 넘어서자 외국인 선교사들과 신도 2만 명을 처형해 프랑스가 침략하는 구실을 주었다. 조선에서도 고종 즉위 3년에 프랑스 선교사들과 신도 8000명이 죽임을 당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를 겪기도 했다.

여기에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인 것도 공통점으로 빼놓을 수 없다. 사덕제는 잇단 프랑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또한 고종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종주국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두 전쟁에서 청군이 패함으로써 베트남과 조선은 스스로 몰락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미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진 중국에 기대려 한 일이 되레 망국의 지름길이 된 셈이다. 당시 사덕제는 '자책(自責)'이란 글에서 "짐의 가문이 어찌 공덕이 있으리요. 단지 뻔뻔스러움으로 앉아서 늙어 약해질 때까지 버텨 보지만 천하가 참지 못하고 나를 책망하니 어떻게 속죄할 수 있으리"라며 참담한 심경을 드러냈다. 말년의 고종도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어 한숨이 나온다.

망국 후 조선 왕실은 일본 천황가 아래 '이왕가(李王家)'로 전락했지만, 고종은 이태왕으로 궁궐에 남았고 직계후손은 일본 왕족 대접을 받았다. 베트남 왕실도 프랑스 총독과 일본 점령군 사령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1945년까지 지속됐다. 백성들은 식민 지배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는데도 군주와 왕족들은 호의호식한 셈이었다. 두 나라 모두 왕정 복귀 세력이 힘을 얻지 못한 것도 이처럼 '한심한'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 탓이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임시정부가 왕이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백성의 나라인 민국(民國) 체제를 택했을까 싶다.

조선 의친왕 이강(왼쪽)과 오른쪽은 1907년 8살 때 즉위하는 베트남 유신제
조선 의친왕 이강(왼쪽)과 오른쪽은 1907년 8살 때 즉위하는 베트남 유신제

물론 왕실의 구성원 모두가 식민지배에 순응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 왕 유신제는 1916년 독립운동 단체인 광복회의 반란 계획에 동참해 왕궁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6일 만에 체포되어 아프리카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역시 1919년 항일 비밀결사체 대동단의 거사에 따라 국내를 탈출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했다. 비록 중국 단둥에서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지만 그나마 왕실의 체통을 지킨 일이었다.

베트남과 조선의 '망국 군주'와 대비되는 인물로는 태국의 '명군' 라마 4세(재위 1851 ~1868)를 들 수 있다. 그는 청나라가 서구 제국주의에 무참히 짓밟히자 "중국과 같은 꼴을 당할 순 없다"면서 근대화 개혁에 착수했다. 망해가는 청나라에 목을 맨 고종이나 사덕제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대목이다. 라마 4세는 런던과 파리 등 6곳에 영사관을 개설해 열강들과 우호관계를 도모했다. 또 서구의 교통, 통신 시설을 들여오고, 최초로 영어 교육을 실시하는가 하면, 서구인 용병들을 고용해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다.

라마 4세와 그를 소재로 1956년에 만든 헐리웃 영화 《왕과 나》 장면. 그가 다소 야만적으로     묘사되어 지금도 태국에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오른쪽은 라마 5세.
라마 4세와 그를 소재로 1956년에 만든 헐리웃 영화 《왕과 나》의 한 장면. 그가 다소 야만적으로 묘사되어 지금도 태국에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오른쪽은 라마 5세. ⓒ이원혁 제공

그의 아들 라마 5세(재위 1868~1910)는 오히려 부왕보다 더 '걸출한' 왕이었다. 그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고, 근대화된 행정 체계를 갖췄으며, 서구식 무기와 군제를 도입하는 등 국정 전반의 개혁을 이뤄냈다. 대개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 세력의 완충지대라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독립을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아마 라마 5세의 '절묘한' 외교적 성과가 간과된 때문일 게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를 끊임없이 설득하고 끈질긴 협상력을 발휘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만 넘겨주고 영토를 온전히 지켜냈다. 그가 근대화를 이룬 '구국의 군주'로서 메이지 일왕에 버금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시아 침탈 시기, 태국 왕실이 끝내 살아남은 데는 그럴만한 역사가 있었다"

어떻게 라마 5세가 탐욕스런 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이처럼 능수능란한 외교를 펼칠 수 있었을까? 필자가 그의 행적에서 특히 주목한 부분은 즉위하자 마자 국외로 여행을 떠난 사실이다. 15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놀랍게도 섭정에게 나라를 맡기고 5년 동안 인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된 이웃나라들을 두루 살폈다. 그곳에서 식민지배의 참상을 목격하며 근대화 열망을 다졌고, 제국주의의 생리를 터득했을 터다. 12살에 즉위해서 아버지 대원군이 섭정하며 치마폭에 파묻힌 '철부지' 고종과는 첫 출발부터 달랐던 것이다. 세계를 누비며 직접 보고 느낀 것과 나라 문을 잠그고 구중궁궐 높은 담에 갇혀 지낸 차이가 결국 '구국'과 '망국'을 갈랐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얼마 전 '고종의 길'이 열렸다. 한 나라 군주와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간 길을 서울시에서 복원한 것이다. 한술 더 떠 대구에서는 '순종 어가길'을 만들고 그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망국 전 해,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린 순종이 일제 군복을 입고 일본 건국신을 참배하러 다닌 길을 재현했다고 한다. 이 나라 지자체는 아픈 역사를 교훈 삼는 '다크 투어리즘'이란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참으로 뒤틀리고 어처구니 없는 우리 역사의 장면들이 100년 넘도록 자각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점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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