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를 권리와 같을 책임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04 16:00
  • 호수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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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하도 한 줄 서기 세상에서 오래 살다 보니, 내게는 별 희한한 습관이 다 있다. 어떤 사상가의 책을 읽다 보면 이 사상가가 그 생각의 원조냐를 따지게 되는 습관. 더 올바르고 정확한 생각이 있다는 생각. 모든 생각을 한 줄로 세우는 근본 생각이 있다는 생각. 실제로는 이런 생각은 없으므로, 나의 습관은 망상 또는 강박증일 것이다.

나만 이렇게 거창한 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가 최초, 최고, 가장, 제일, 올바름, ‘더 베스트(the Best)병’을 앓는다. 심지어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회의원이 표결하는 문제에까지도 정답에 입각한 투표를 안 했다고 욕한다.

지나가버린 일이지만 재연될 수 있기에 짚는다. 20대 국회 때의 일이다.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법인세 인상안에 반대표를 던진 사건이다. 정의당 의원이 어떻게 반대표를 던질 수가 있나? 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심지어 당내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정의당 의원은 반대표를 던지면 안 될까?

6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의당 관계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6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의당 관계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르다’를 ‘틀리다’로 읽지 말아야

이정미 의원은 고민했다고 한다. 법인세 인상 기준을 상향조정하면 대다수의 기업이 빠진다. 정의당 의원으로서, 법인세 인상이라는 허울에 가려 실제로 발생할 문제를 외면하고 단순한 거수기 노릇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표를 통해 의사표현을 할 것인가. 만일 그 투표가 한 표가 모자라면 부결되는 것이 분명한 사안이었다면 고민의 결론은 다르게 났을 것이다. 그러나 가결이 분명한 사안 앞에, “내 생각은 다릅니다”라고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한 반대투표는 악이 아니다.

결과는 무참했다. 찬반은 어디까지나 선과 악이고, 한쪽에 줄 서지 않으면 다른 쪽에 속해 버린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늘 고통받고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왜 정의당 의원이 (엄연히 다른) 민주당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욕할까.

나는 우리 사회가 시급히 이런 진영 이분법을 벗어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느낄 때가 많다. 겨우 민주적 정부를 세운 다음 이분법적 행태로 말미암아 다음번엔 파시스트적 정권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 있다. 이미 180석을 차지한 정당이 그런 태도를 보이면 더 큰일이다. 다수의 횡포가 되기 쉽다.

누구나 다 “네가 틀렸다”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그래서 거의 캠페인처럼, “틀리다”와 “다르다”는 “다르다”는 말을 하곤 한다. “나는 네 생각과 달라”라는 말이 “네 생각은 틀렸어”로 자동 번역된다. 이런 얘기도 아마 신문 칼럼 주제로 백만 번은 쓰였을 것이다. 심지어 “이의 있습니다”라는 말로 왕따가 되어 버린 사람을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이의를 용납 못 한다.

생뚱맞게도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IMF 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울분으로 가득 차 누군가를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과 정처를 정하고 소속되고 싶은 외로움. 비교적 공동체의식을 유지해 가며 살아오던 대한민국이란 사회가, 아니 사회 자체가 깨어져버린 것이 바로 IMF였다. 우리 편에 속하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로 느껴진다.

하지만 지난 2~3년간 우리 국민은 조금은 다른 경험을 하고 산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알고 보니 한국은 행정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꼽을 만한 국가고, 시민의식과 질서의식에 관한 한 가장 빼어난 국가다. 소수정당과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발언권과 살 권리를 확보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도 아무 탈 안 나는 튼튼한 나라다. 그 사실을 다수당부터 깨닫자. 원조 아니라도, 좀 달라도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우선 차별금지법을 민주당이 찬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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